기본적 인권의 측면에서 미군정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선 군정 초창기에 경제 못지않게 노동 부문에서도 한국 상황에 대한 잘못된 인식, 특히 한국사회에 대한 문명우열론적인 오판으로 인하여 실효적인 인권신장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였고, 1947년에 들어서야 공창제 폐지를 통해 여성인권의 일부 신장을 가져오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 부문에서 미군정기의 가장 큰 성과는 형사사법 제도의 개혁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검사와 사법경찰관에 의한 강제수사와 그에 수반한 인신구속이 만연하던 종래의 형사사법절차에 일정 수준 제도적인 제동을 걸고 미국 식의 인신보호제도를 도입함으로써 향후 한국민의 신체의 자유 보장에 대한 기대수준을 한층 끌어올린 것이다. 이는 이후 대한민국의 권위주의 정부시기에 국민들이 ‘회복해야 할 대상’의 수준을 상정하는 데 있어서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군정 당국은 점령 말기에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를 앞두고 국제사회에 대한 신뢰를 얻기 위해서 「조선인민의 권리에 관한 포고」로써 일종의 포괄적인 기본권 목록을 제시하였다. 이는 이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의 방향성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의미는 군정기에 실제로 보장되고 있던 권리들의 목록이라기보다도, 앞으로 건설될 대한민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들의 전형을 선보였다는 데에서 찾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로써 상징되는 바, 미군정기 3년이 기본적 인권의 전반적 신장에 있어서 가지는 가장 주요한 의미는 인권의 ‘실제적인’ 확장·구현보다도 향후 인권의 ‘지향점’을 일정 부분 제시해 준 데에 있었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1) 일반노동임금 (법령14호)
1945년 10월 10일 군정법령(Ordinance) 제14호로 공포되어 10.19.부터 시행된 『일반노동임금』은 1945년 9월 8일 한반도에 진주하여 수립된 미군정 당국이
註01 노동관계를 직접 규율할 목적으로 제정한 첫 법령으로 알려져 있다. 이 법령은 군정청이 수립 직후부터 조선인과 미 군정관으로 조직한 민·관연합위원회에서 일반노동자에 대한 표준임금을 단기간 조사한 결과물로 보인다.
註02
내용의 골자는, 조선정부(Korean Government, 즉 군정청을 뜻한다)가 전부 또는 일부를 소유·감독하는 회사 등 조직의 근로자(공무원은 제외)에 대한 기본 日給을 그 숙련도에 따라 견습생(1~2엔)-미숙련-반숙련-숙련(7~10엔)의 4단계로 나누는 한편(제1조)
註03 동일직급 근로자의 남·녀·노·소 또는 감독자인지의 여부에 따라 7원까지 차별지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이와 같이 차별하는 “동양 재래의 관습을 허함”이라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법령은 위 일반고시 제1호 『미곡의 자유시장』과 마찬가지로 점령 초기 인플레이션 요인을 파악하지 못한 미군정의 운영미숙을 보여준다. 이를 지적한 견해로, 당시 미 해군대위로서 군정청 정보장교로 근무했던 미드(E. Grant Meade)는 이 법령을 들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당시) 미국인 치고 조선인들에게 민주정부의 운영에 관해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굳게 믿지 않는 이는 좀처럼 없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믿으면서도 정작 그 한국인들에게 있어 통제되지 않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지식과 경험 또한 없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있었다. …(중략)… 결정적인 오류는, 미곡시장 자유화 조치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물가에 대한 일체의 통제를 푸는 상태에서 임금만을 통제하려 했다는 데 있었다. 그로써 모든 노임을 통제할 수 있었다면 물가 또한 합리적인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이 법령은 조선인 근로자 중 적은 일부에게만 적용되었던 것이다.”
註04
(2) 최고노동시간 (법령121호)
1946년 11월 7일 공포·시행된 군정법령(Ordinance) 제121호 『최고노동시간』의 내용 요지를 보면, 우선 상·공업 및 공무 부문의 최고노동시간을 제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제1조) 이 법령은, 원칙적으로 이 부문 피용인의 노동시간 한도를 주 60시간으로 규정하고, 예외적으로 노사협약으로 정한 경우에 한해 주 48시간을 초과하여 노동하도록 하되 이에는 기본급의 15% 이상의 수당을 지불하도록 하며, 일요일 등을 제외한 법정공휴일에는 8시간을 노동한 것으로 간주하는 한편 주 24시간 이상의 연속휴식권을 부여하고 있다(제2조). 다만 소정의 집행직·관리직·전문직(제4조)을 비롯하여 계절적 공업, 농·수산업, 국유철도 업무 등에 종사하는 피고용인에 대하여는 제2조를 적용하지 않는 예외를 두고 있다(제3조). 한편 이 법령에 따라 군정청 노동부장은 이 법령의 시행을 위한 규칙·명령을 제정하고 노동실태에 대한 감독·조사를 할 권한을 가지고(제5조, 제6조), 고의로 이 법령 또는 노동부 규칙에 위반한 자는 그 누범 횟수에 따라 직전에 받은 최종 刑의 3배 이상까지의 형에 처해질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제9조).
그러나 이 법령 중 주 24시간의 연속휴식권을 규정한 부분은 38도선 이북의 전력공급 차단으로 남한에 전력부족 사태가 오면서 1947년 12월 24일 행정명령 제10호 「노동에 관한 규정의 임시정지」에 의해서 그 적용이 중지되었다. 이후 1953년 5월 10일 법률 제286호로 「근로기준법」이 제정되면서 이 법령 전체는 후술하는 「미성년자 노동보호법」과 더불어 흡수폐지되었다.
(3) 아동노동법규 (법령112호)
1946년 9월 18일 군정법령 제112호로 제정(10.18. 시행)된 「아동노동법규」는 조선에 아동노동이 만연하다는 판단 아래 “전 세계 문명 각국이 채용하는 인도적·계몽적 원리에 따라” 이를 시정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당시 5,249개 공장을 대상으로 조사한 『노동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근로자 총 122,159명 중에서 18세 미만자의 비율은 26.6%(전체 남성 근로자의 12.2%, 전체 여성 근로자의 61.4%)에 달하고 있었다.
註05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연령별 고용·종사 금지업종에 관한 규정으로, ① 만 12세 미만 아동의 고용은 전면 금지하고(제2조 제3항), ② 만 14세 미만 아동은 14종으로 열거한 상공업 관련 업종에 고용·종사시킬 수 없도록 하는 한편(제2조 제1,2항) 그 공립학교 출석시간을 보장하며(제3조), ③ 만 16세 미만 아동은 24종으로 열거한 중공업 또는 유해한 사업에 고용·종사시킬 수 없게 하였다(제4조). ④ 또한 만 18세 아동은 17종으로 열거한 생명·신체에 위험하거나 건강·도덕에 유해한 사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하고(제5조), ⑤ 이에 더해 만 21세 미만의 여자는 광산·채석소 등 4종의 업종에 고용·종사시킬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제6조).
다음으로 연령별 최대 노동시간에 관하여 18세 미만의 아동은 모두 6일을 초과하여 근무하지 못하도록 하고 소정 새벽·심야시간의 근로를 금지하되 주 근로시간은 연령에 따라 (i) 16세 미만의 경우 48시간(1일 8시간), (ii) 18세 미만의 경우에는 54시간(1일 10시간)을 초과할 수 없도록 하였고(이상 제7조, 제8조), 또한 만 18세 미만 아동의 고용계약 기간은 6개월을 초과할 수 없도록 하였다(제10조).
한편 근로조건에 관하여는 병고휴일(병가) 및 임신·육아휴일(제11조), 16세 미만 고용아동의 교육·오락시간(제12조)을 보장하고, 고용주 부담 하에 6개월마다 신체검사를 받도록 하였다(제14조). 그 밖에 고용주는 고용증명서를 비치할 의무를 지고(제15조) 그 외 각종 행정적 의무규정의 적용을 받는다(제16조).
그러나 내용상 혁신적이었던 이 법령은 한편으로 아동노동자에 대한 생활보장과 의무교육 실시는 없이 고용만을 금지하면서 아동들을 오히려 실직으로 내몬다는 외부의 비판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는 공장 생산성에 대한 타격으로 인해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내부의 비판에도 직면하였다. 이에 군정장관대리 헬믹(Helmick)은 조선의 실정을 반영하여 법령을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1947년 1월 9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제8차 회의)에 참석하여 이 법령을 수정하여 해 줄 것을 요구하고, 과도입법의원에서의 숙의를 위하여 2월 24일 군정법령 제132호로 「아동노동법규의 일시정지」를 공포하였다. 그리하여 논의 결과 대체입법으로 등장한 것이 아래의 「미성년자 노동보호법」이다.
(4) 미성년자 노동보호법 (남조선과도정부법률4호)
군정청의 의뢰에 따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는 헬믹 대장(代將)이 보내온 법안을 의원 산하의 산업노농위원회에 회부하였고(1947.1.13. 제10차 회의), 위원회는 1947.3.26. 제38차 본회의에 이를 제출하였다. 위 위원회의 박건웅 위원이 한 제안취지에 따르면 이 법안은 “우리 민족이 한 독립국가를 형성해 가지고 동방에 있어서 다른 나라와 경쟁하는 데” 가장 필요한 생산을 도모하고 노동기술을 학습·훈련함으로써 “우리의 독립국가 재건상 절대 필요한 것”이라고 하였고(1947.3.28. 제40차 본회의), 이런 견지에서 기존의 “문명 각국”의 표준에 맞춘다는 입법목적은 사라졌다.
수정안은 미성년노동자의 연령별 종사금지 업종이나 최대노동시간에 있어서는 종전 법령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나, 종전 법령과 달리 평등의 관점에서 남녀구분 없이 18세 미만 아동근로자에 대하여 규정내용을 통일하였고, 미성년자를 상대로 하는 일체의 고용계약(기간의 상한은 1년)은 사전허가의 대상이 되도록 한 점(제6조 이하)이 주요한 차이를 보인다.
38도선 이북의 전력공급 차단으로 남한에 전력부족 사태가 오면서 1947년 12월 24일 행정명령 제10호 「노동에 관한 규정의 임시정지」에 의해서 이 법률의 핵심적인 규정들, 즉 ① 미성년자의 야간노동을 금지하는 규정과 ② 주 6일 이상의 노동을 금지한 규정이 각각 그 적용이 중지됨으로써 법률의 실효성이 반감되었다. 그러나 그 직전인 1947년 12월 18일만 하더라도 경기도지사가 기자회견에서 공장 50개소를 조사한 결과 이 법률 위반 건수가 28건에 달했다고 언급하였던 것에 비추어,
註06 이 법률의 실효성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1953년 5월 10일 법률 제286호로 「근로기준법」이 제정되면서 이 법령은 흡수폐지되었다.
(5) 미성년노동자의 교육 급 보건 (노동부령제2호)
앞서 본 남조선과도정부법률 제4호 「미성년자 노동보호법」 제13조에서는 고용주로 하여금 18세 미만 피용자에게 매주 단위로 고용에 관계되지 않은 보통교육 4시간, 보건·오락 2시간을 실시하도록 규정했는데, 여기서의 교육·보건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하기 위해 1947년 9월 15일 노동부령 제2호로 제정한 것이 「미성년노동자의 교육 급 보건」이다.
이 령은 10인 이상 아동을 고용하는 고용주로 하여금, 고용아동의 학력수준에 따라 국민학교 3학년 미만 수료자(제1반), 동 학년 이상 수료자(제2반), 국민학교 졸업자(제3반)의 3개 반으로 나누어 해당 교육과정의 인정교과서로 교육을 주 4시간 이상 실시하도록 하되, 그에 더해 보건 차원에서 체조·음악을 2시간 이상 교습하도록 했다.
(6) 부녀자의 매매 또는 기매매계약의 금지 (법령70호)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매매춘은 존재했으나, 매매춘 업소를 국가가 허가·등록의 대상으로서 합법화하면서 관리하는 공창제(公娼制)가 한국에 도입된 것은 조선총독부가 1916년 3월 31일 경무총감부령 제4호로 공포(동년 5.1. 시행)한 『대좌부·창기 취체규칙(貸座敷·娼妓取締規則)』을 통해서였다. 1919년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 제9조는 생명형, 신체형과 더불어 공창제를 전부 폐지한다고 규정하였지만, 공창제에 대한 실효적인 법적 손질이 가해진 것은 해방 이후부터였다.
1946년 5월 17일 군정법령 제70호 『부녀자의 매매 또는 其 매매계약의 금지』는 그 첫 단계로서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향후의 인신매매를 금지하는 한편 기존에 이루어졌던 매매계약의 효력도 전면 부인하고, 그에 수반한 차금(借金)도 무효로 하며 이 법령을 위반한 자는 처벌함을 그 골자로 하였다. 그러나 이 법령은 기존의 유곽영업·창기가업 설치인가의 효력까지 무효로 돌리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공창제 폐지법령으로서 본격적인 실효성을 갖추었기보다는 여성의 기본적 인권을 선언적으로 확인했다는 점, 그리고 이어지는 공창제 폐지논의를 본격화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7) 공창제도등폐지령 (남조선과도정부법률7호)
『부녀자의 매매 또는 기 매매계약의 금지』의 시행을 전후하여 공창제도 폐지여론이 본격적으로 대두하였다. 특히 19개 여성단체로 조직된 공창폐지연맹에서 1946년 하반기와 1947년 상반기에 걸쳐 군정청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각각 공창제 폐지 건의서를 제출하는 한편, 군정청 보건후생부 부녀국도 이에 협력하여 공창폐지운동을 전개하였다.
註07 결국 1947년 4월 22일 박현숙, 박승호, 황신덕, 신의경 등 여성의원을 비롯한 55명의 의원이 과도입법의원에 법률안을 제안하였다.
註08
이 법률안의 내용은 (i) 종전의 『대좌부·창기 취체규칙(貸座敷·娼妓取締規則)』
註09을 폐지하면서 종래의 유곽영업·창기가업 허가도 그 실효하도록 하고, (ii) 동 영업을 계속하는 행위, 매춘행위(매수·매도인 쌍벌주의) 및 그 매개·장소제공 행위, 그리고 타인에게 성병을 전염시킨 자를 처벌하는 것을 그 골자로 하였다.
입법의원의원선거법 등 주요 안건에 밀려 심의가 지연된 끝에 이 법령안은 1947년 8월 7일 본회의에 상정되었고, 같은날 원안 그대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군정장관대리 헬믹(C. G. Helmick)은 1947년 10월 30일 입법의원에 ① “타인에게 성병을 전염시킨 자”를 처벌하는 규정(제3조 라.항)이 매춘행위와의 인과관계를 불문함으로써 공갈목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고 ② 부칙(제4조)에서 정한 3개월의 시행 유예기간은 너무 짧아 전염병 확산가능성을 높인다는 이유로 再議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입법의원이 다른 안건들의 처리 관계로 곧바로 논의를 하지 못함에 따라 헬믹은 1947년 11월 14일 원안대로의 폐지령을 일단 남조선과도정부법률 제7호로 공포하였다(시행 예정일: 1948.2.13.)
이후 입법의원은 1948년 1월 26일부터 1월 29일까지 위 2개 문제를 논의하였으나 ① 제3조 라.항은 삭제하되 ② 시행일은 그대로 두기로 결정하여 군정청에 이송하였고, 이에 따라 군정청은 당초의 시행 예정일인 1948년 2월 13일을 하루 앞둔 2월 12일에 위와 같은 내용의 개정법률을 남조선과도정부법률 제9호로 공포하면서 같은 날 시행되도록 하였다. 이로써 공창제도는 폐지되었으며 이후 박정희 군정기의 구법령 정리사업에 따라 『윤락행위등방지법』(1961.11.9. 공포·시행)으로 대체되었다.
(8) 공창제도폐지령 (행정명령16호)
1948년 3월 19일 행정명령(Executive Order) 제16호로 공포와 동시에 시행된 『공창제도등폐지령』은 그 국·영문 명칭 모두 남조선과도정부법률 제7호와 같지만 동 법률의 구체적 시행에 관한 사항을 군정청이 규정한 것으로서, 그 내용의 골자는 위 법률이 시행된 1948년 2월 13일 이후로 유곽업을 경영하거나 공창업에 종사하고 있던 자는 이 행정명령의 시행일(3.19.)로부터 10일 이내에 퇴거·명도를 완료하지 않는 한 위 법률에 따라 처벌된다는 것이다.
군정청이 이와 같이 법률 제7호의 시행일로부터 약 1개월 반이 지난 뒤에 처벌 시점(始點)을 행정명령 형식으로 새로 규정한 이유는 유예기간을 사실상 늘림으로써 방역목적을 증진한다는, 법률 제9호의 再議요구 사유를 관철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9) 형사소송법의 개정 (법령176호)
군정법령 제176호 「형사소송법의 개정」은 일제강점기의 「조선형사령」에 의하여 의용(依用)되고 있던 2차대전 종식 이전의 형사소송법(이하 ‘구 형사소송법’)을 군정법령으로써 일부 개정한 것으로서, 남한 단독총선거를 앞두고 인민의 시민적 자유 증진을 목표로 이루어진 군정말기 입법 중에서도 형사사법사상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군정법령 제176호의 정확한 제정과정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대검찰청에서 1948년에 발간한 『검찰제요』
註10에 수록된 중간초안들을 통해 제정과정에서의 논의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검찰제요』에 수록된 초안문서로는 「형사소송법 응급조치에 관한 건의 요강」(대법원안), 「검찰관의 구인 及 구류권에 관한 문제」(대법원안에 대한 대검찰청의 대안), 「형사소송에 관한 임시조치령」(司法部 원안), 「길리암 사법부 美人고문의 형사소송법개정초안」, 「사법부안에 대한 수정이유」(대검찰청 대안)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註11
- 註10
- 대검찰청 편, 『검찰제요』, 1948. 이 책자의 소장처에 관하여 신동운, ‘수사지휘권의 귀속에 관한 연혁적 고찰’, 서울대학교 『법학』 제42권 제1호, 2001, 204쪽의 주 65에 따르면 1948년 제주지방검찰청장을 역임한 양홍기의 손자 양창수(현 서울대 법과대학 명예교수)가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군정법령 제176호에 개정한 내용은 비록 수사·기소·공판의 단계로 나뉘는 형사사법절차 가운데 강제수사절차에 관한 것에 국한되지만, 인신구속제도를 전면 개편하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누구든지 구속당할 자의 성명 및 피의사건을 기재한 재판소가 발한 구속영장 없이는 신체의 구속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영장주의 원칙을 선언하였다(제3조 본문). 이는 조선형사령 체제에서 ‘급속처분’이라는 명목으로 폭넓게 영장 없는 구금을 허용한 것을 원칙 차원에서 철폐한 것이다. 특히 현행범인 경우 등 예외적으로 영장 없이 긴급구속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48시간(재판소가 없는 府, 郡, 島의 경우 5일) 이내에 재판소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아야 하고, 발부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즉시 석방하도록 함으로써 영장제도의 실효성을 강화하였다.
둘째로, 피의자의 변호인 선임 및 접견교통권을 처음으로 보장하였다. 특히 구속 시에는 “즉시로 그 구체적 범죄사실과 제14조의 규정에 의한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는 취지를 알려야 한다”는 소위 미란다(Miranda) 조항을 도입하였다(제11조 제1항). 또한 피의자와 변호인의 접견 및 서신왕복에 대하여도 공판 전에는 죄증인멸·범인도피의 우려가 있는 경우가 아닌 한, 그리고 공판회부 이후에는 절대적으로 금지하지 못하도록 하였다(제14조, 제15조).
셋째로, 설사 영장에 의해서 구속된 자라 하더라도 그 구속의 적법여부에 대한 심사를 법원에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구속적부심사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하였다(제17조). 비록 군정법령 제176호가 시행된 1948년 4월 1일부터 같은해 9월 25일까지 구속영장이 발부된 건수는 6,472건인데 그 중 영장청구가 각하된 건수는 30건에 불과했다는 점에 비추어
註12 법원의 영장심사가 운영면에서 수사기관의 구속을 실효적으로 통제했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구속적부심사 제도의 도입경험 자체는 이후 1948년 헌법(제9조 제3항) 이래로 이 제도가 헌법상의 제도로 정착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10) 조선인민의 권리에 관한 포고 (1948.4.5.)
UN 한국임시위원단에서는 1948년 3월 17일 5월 총선거의 자유분위기 달성에 관한 「건의안」을 채택하여 군정당국에 전달, 공표하였는데 이는 법률문제, 선거에 관한 강박의 문제, 언론자유의 문제, 정치범 문제의 4개항에 걸친 건의사항들을 천명한 것으로, 그 중에는 언론·보도·집회의 자유, 투표권의 행사 여부에 대한 자유를 군정당국이 보장하고 있음을 보여달라는 촉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註13 미 주둔군사령관 하지(John R. Hodge) 중장이 1948년 4월 5일 발표한 「조선인민의 권리에 관한 포고」는 이러한 UN 측의 촉구에 대한 대응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내용은 선거에 참가할 조선 인민이 아래와 같은 일련의 기본적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선언으로서, 그러한 권리에는 우선 신체의 자유, 주거의 자유, 표현의 자유(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재산권(소유권) 등 핵심적인 자유권이 모두 포함된다. 특히 신체의 자유와 관련해서는 죄형법정주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 자백배제법칙 등의 실체적·절차적 권리가 모두 열거되어 있다. 비단 자유권적 기본권에 해당하는 권리뿐만 아니라 평등권, 적법절차에 대한 권리, 청원권 등이 함께 열거되어 있다.
요컨대 이 포고는 미군정기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선 인민의 ‘기본권’을 포괄적으로 열거한 권리장전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특히 1948년 헌법의 주요 기초자였던 유진오가 헌법기초 당시 활용했던 참고자료로 열거하고 있는 문헌 중에도 포함되어 있다.
註14
군정청 정치고문인 제이콥스(Joseph E. Jacobs) 이 포고를 국무부장관에게 보고하면서 하지의 이 포고가 “남조선에서 기본권에 관한 새로운 법원(法源, source of law)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논평하는 한편, 그 내용은 “일본 헌법에서 규정한 시민적 권리들, 그리고 미국 헌법의 권리장전에서 보장한 자유권들의 합성물”이라 평가하고 있다.
註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