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국내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인 1946년 5월 초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아무런 결론 없이 무기 휴회하자, 국내 정치세력은 김구 중심의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론, 이승만 중심의 남한단독정부수립론, 김규식과 여운형 중심의 좌우합작위원회로 분화되었다. 미군정은 좌우를 아우르는 새로운 기구를 마련하고자 하였고, 김규식과 여운형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지원하면서 그것을 입법기관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설립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하 ‘입법의원’으로 약칭)은 미군정에 소속된 행정기관의 일부로 구상된 것이었지만, 미군정 하에서 준입법기구의 성격도 동시에 갖는다. 여기에서는 정부수립에 대비한 헌법안과 국가 조직의 근간을 이루는 법안들이 논의되었다.
입법의원은 모스크바삼상회의결정에 의한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개혁의 기초로 사용될 법령 초안을 작성하는 임무를 갖도록 하였다. 다만 입법의원에서 제정한 법령은 군정장관의 동의를 얻어야 그 효력이 발생할 수 있었다. 입법의원은 특별위원회로 행정조직법기초위원회와 임시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행정조직법기초위원회에는 위원장 신익희, 오하영, 천진철, 신중목, 문진교, 장연송, 정광조, 백남용, 서상일(이상 9명)이 선출되었다. 임시헌법기초위원회에는 위원장 김붕준, 손문기, 최동오, 김철수, 이봉구, 하경덕, 박승호, 이주형, 변성옥(이상 9명)이 선출되었다.
1947년 2월 27일에는 행정조직법기초위원회 위원장 신익희가 「행정조직법기초위원회안」을 입법의원에 제출하였으나, 실제 적극적으로 추진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서상일이 3월 3일에 남한단독정부수립 구상을 규정화한 「남조선과도약헌안」을 입법의원에 제출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중도파세력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별도의 헌법안을 작성하게 되었고, 4월 18일에 임시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 김붕준이 임시헌법기초위원회안으로서 「조선민주임시약헌초안」을 제출하였다. 이 가운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거치면서 「남조선과도약헌안」과 「조선민주임시약헌초안」이 함께 논의되어 통합되는 과정을 거쳤고 최종적으로는 「조선임시약헌」으로 입법의원에서 의결되게 된다. 그러나 미군정이 인준을 보류하여 최종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한편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1947년 5월 21일부터 재개되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는 한반도에서 민주주의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남북한에 소재하고 있는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의 견해를 청취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각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답신안을 작성하여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이 답신안에는 총선거, 정부형태 등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어 각 정치 세력 간의 견해 차이가 나타났다.
(1) 남조선과도행정조직법초안(이른바 신익희 안)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는 특별위원회로 행정조직법기초위원회를 두었고, 이 위원회에서 남조선과도행정조직법초안을 작성하여 1947년 2월 27일 제23차 입법의원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이 법안의 제출이유에 대해 행정조직법기초위원회 위원장 신익희는 남쪽 해방공간의 행정조직을 규정하여 남북의 통일된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과도적 행정의 기초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입법의원에서는 이 법안의 비민주적 성격, 주한미군사령부의 권한 침해, 헌법채택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 그리고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하여 심사보고하도록 결정하였다. 다만, 행정조직법기초위원회안은 이후 남조선과도약헌과 임시헌법기초위원회안이 제출되어 논의됨으로써 다시 상정되지 않았다.
남조선과도행정조직법 초안(이른바 행정조직법기초위원회안 또는 신익희안)은 5장 57개조로 편제되었다. 이 법안은 남쪽 해방공간(북위 38도 이남의 남조선)의 행정을 미군정으로부터 이양을 받아 민주주의원칙에서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리고 남북이 통일된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이것을 대신할 법률이 제정될 때까지 그 효력을 가지는 잠정적인 정부형태를 구상하는 것으로 하였다. 미군정으로부터 행정을 이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행정부 주석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대통령제)를 취하는 것으로 하였다. 행정부의 장으로 주석 이외에 부주석, 행정 총장을 두었는데, 주석과 부주석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선거한다. 이 법안은 당시의 미군정체계를 접수하여 조선인화 하려는 의도가 내포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안은 행정부에 관한 행정조직법안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조항은 포함하지 않았다.
(2) 남조선과도약헌안(이른바 서상일 안)
남조선과도약헌안은 1947년 3월 3일 서상일 의원이 대표하여 입법의원에 제출한 것이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특별위원회로 행정조직법기초위원회와 임시헌법기초위원회가 있었지만, 서상일은 이와 별도로 남조선과도약헌안을 제출한 것이다. 이 안의 제안이유서에서는 당시의 군정이 군민정합치단계, 민정단계, 과도임정단계, 남북통일임정단계, 정식정부수립단계를 거쳐 정부가 이양되어야 하는데, 이 안은 군민정합치 단계에서 민정단계로 전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서상일은 법률전문가 4, 5인이 각각 헌법안을 제출하였고, 그것을 가지고 여러 번 수정하고 검토하여 남조선과도약헌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심지어 필리핀 등 여러 나라의 헌법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헌법안의 내용으로 인민의 권리와 의무를 나열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약헌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남조선과도약헌안은 제1장 총강, 제2장 입법의원, 제3장 행정부(제1절 행정부주석급부주석, 제2절 정무회의, 제3절 감찰원, 제4절 지방제도), 제4장 사법, 제5장 재정, 제6장 부칙으로 총 6장 45개 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2조에서 “인민은 법률상 평등이며 민주주의의 모든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향유함 인민의 자유 또는 권리를 제한 혹은 박탈하는 법률의 제정은 사회안전을 보위하거나 혹은 공공의 리익을 증진함에 필요한 경우에 한함”이라고 하여 일반규정만 두고 있을 뿐, 개별적 권리의무에 대해서는 규정되어 있지 않다.
정부형태 면에서는 내각책임제 정부형태를 취하고 있다. 주석과 부주석은 입법의원에서 선거한다. 내각책임제 정부형태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석, 정무총장과 함께 부주석도 두고 있다. 정무총장은 주석이 임명하고 입법의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정무위원은 정무총장이 추천하고 주석이 임명하되 입법의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정무위원은 10인 이상 15인 이내로 한다. 정무총장과 정무위원은 정무회의를 조직한다. 그리고 입법의원에 대하여 공동(連帶)으로 책임을 진다. 정무총장은 정무회의의 의장이 된다.
이 헌법안은 임시헌법기초위원회에서 새로운 헌법안이 제출될 경우 어떻게 될 것인지 논란이 되었고, 법제사법위원회, 임시헌법기초위원회, 행정조직법기초위원회의 연석회의에 넘겨서 심사․보고하도록 결정되었다. 세 위원회의 연석회의에서 심사를 마친 수정안은 3월 31일에 입법의원 의장 김규식에게 제출되었다. 이후 임시헌법기초위원회가 제출한 헌법안과 함께 논의되어 조선임시약헌으로 통합되기에 이른다.
(3) 조선임시약헌
조선임시약헌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의결한 임시헌법이다. 그러나 조선임시약헌이 의결되기까지는 다소 우여곡절도 있었다. 본래 입법의원에는 특별위원회로 행정조직법기초위원회와 임시헌법기초위원회가 있었는데, 임시헌법기초위원회가 임시헌법안을 마련하기 이전에 남조선과도행정조직법초안(이른바 신익희안)과 남조선과도약헌안(이른바 서상일안)이 제출된 것이다. 이에 따라 임시헌법기초위원회도 시급히 헌법안을 작성하여 1947년 3월31일 입법의원에 제출한 것이다. 이 안은 당시 조선일보에 ‘조선민주임시약헌초안’(조선일보, 1947. 4. 2)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었는데, 이 안은 민주의원에서 통과되었던 대한민국임시헌법안을 급하게 수정하여 제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안은 행정조직법기초위원회안 그리고 남조선과도약헌안과 달리 국민의 권리의무를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입법의원에서는 먼저 제출된 남조선과도약헌안은 임시헌법기초위원회에서 기초한 조선민주임시약헌초안과 그 관계가 문제되었다. 결국 두 가지 헌법안은 김광현(金光顯) 의원이 제안한 바에 따라 “임시약헌 과도약헌 양안을 법제사법위원회와 임시헌법기초위원회의 연석회의에 부쳐 합병심사한 후 통일안을 작성하여 일주일 이내에 보고케 할 것”을 결의하여 하나의 헌법안으로 통합하기로 하였다.
남조선과도약헌안과 조선민주임시약헌초안은 각각 1독회를 마친 후 법제사법위원회와 임시헌법·임시선거법기초위원회의 연석회의에 회부되었으나, 이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되는 등 정세의 변화가 심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되던 시기 두 안의 통합논의는 지연되다가,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될 즈음 다시 논의가 재개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7월 7일에 이르러서야 실제 두 안을 하나로 통합한 「조선민주임시약헌안」(朝鮮民主臨時約憲案)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7월 16일 제109차 본회의부터 제2독회를 시작하였다. 이날, 법안명을 「조선임시약헌(안)」朝鮮臨時約憲(案)으로 수정하였다. 제2독회는 8월 6일에 끝나고 최종의결되었다. 이 조선임시약헌은 한국민주당 당보인 『한국민주당특보』(1947. 9. 5)와 미군정청 공보부 여론국 정치교육과에서 발간한 『민주조선』 제6호 (1948.5. 1)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임시약헌은 총 7장 58개 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있어서는 생활균등권과 문화 및 후생의 균등권이 규정되었고, 계획경제의 수립, 농민 본위의 토지 재분배, 주요 기업의 경영관리에 종업원대표 참여 등이 규정되었다. 정부형태에서는 대통령제를 취하였는데 주석과 부주석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임기는 4년으로 하였다. 최초의 주석과 부주석은 입법의원에서 간선하되 이후에는 국민 직선으로 하였다. 주석과 부주석 이외에 국무총장도 두었다.
조선임시약헌안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의결되었고, 미군정 군정장관의 인준을 받게 되면 보통선거법과 같이 9월 2일 공포식을 거행하기로 일정을 정하였다. 그러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된 후 조선임시약헌안에 대해서도 미군정은 인준을 보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