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일제강점기는 일시에 종식되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남북 분할점령으로 인하여 해방과 동시에 새로운 한반도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선취하고자 하는 좌·우익 정파들 사이에 투쟁이 시작되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총독부의 철수 직전 막대한 조선은행권 남발, 사회지배층을 이루던 일본인 사업자들의 대거 이탈로 인한 실업자의 폭증, 해외이주민들의 대량 이입으로 인한 인구의 폭증 등으로 인하여 물가의 초인플레이션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은 상당부분 미국과 소련의 점령 그 자체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전승 점령국인 미국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정치적으로 친미적인 우익세력을 강화하면서 경제적 안정을 촉진하면서 한반도에 -초기에는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남북 단일정부로서, 공위의 결렬 이후로는 남한 단독정부로서라도- 안정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통치권을 이양하는 것이 점령의 목표였다. 그러나 초창기 군정당국은 한국의 실정이 「야행금지령」과 같은 최소한의 치안유지와 「미곡의 자유시장」과 같은 자유방임으로 진정될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는 미숙하였고, 이는 1945년 말부터 경제·노동 부문에 대한 강력한 통제정책으로 선회하는 반작용을 초래하였고, 통제의 범위는 경제 일반 그리고 언론·출판·정치활동의 영역으로 순차 확대되었다. 기성 국가로 비유한다면 국가긴급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점령군정의 강력한 통제기제들이 군정기에 속속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UN의 감시 하에 남한의 단독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는 미국의 새로운 정책노선이 전개됨과 함께 앞서 보았던 (광의의) 정부조직이 속속 완성되면서, 군정 당국은 선거를 통한 ‘정상국가’의 출범을 위해, 그리고 한편으로는 동시에 정부가 수립될 북한과의 체제경쟁에 대비하여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점차 확대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조선인민의 권리에 관한 포고」에서 그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1) 야행금지령 (통행금지령1호)
미군정청 관보(Gazette)에는 1945년 9월 29일자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군정정관 아놀드의 명의로 공포된 「야행금지」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영문본에 수록된 일련번호는 Curfew Number 1이다. 미육군 점령지역 내 조선인민이 기존의 통행금지를 “자진하여 불평없이” 준수하였으므로 1945년 9월 19일-20일부터 통행금지 시간을 22시부터 04시까지로 단축한다는 이 ‘금지령’의 前文에는 “일반명령(General Order) 제6호는 左와 如히 개정함”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 일반명령 제6호는 관보 기타 수록처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주한미군사(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약칭 HUSAFIK)』에서는 1945년 9월 9일 서울로 진주한 제324·184보병연대가 20시부터로 설정되어 있는 통행금지령을 실시하기 위해서 1945년 9월 9일에서 9월 10일로 넘어가는 밤에 서울시내에 기동정찰체계를 운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註01 부산지역의 신문에서는 9월 24일자의 “일반포고 제1호”로 9월 25일 20시부터 다음날 04시까지의 야간통행금지를 발령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비록 1945년 9월 8일 미군 제24군단이 인천에 처음으로 상륙하였지만 내륙까지 진주하는 데에는 약 15일의 시일이 걸렸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위 “일반명령 제6호”는 통행금지 시간을 22시부터로 설정해 놓았지만 그 발효시기는 각 지역별로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미육군이 한반도에 처음 진주하면서 점령군으로서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치안유지를 위한 통행금지령 발령이었다는 사실뿐이다.
이 금지령은 약 36년간 계속된 야간통행금지의 시초를 보여준다. 한국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계속되고 있던 야간통행금지는 1954년 4월 1일 『경범죄처벌법』이 제정되면서 “사회에 위험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때” 내무부장관이 정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상의 근거를 획득하였다. 이후 내무부장관의 告示로 지역적(관광특구·접경지대), 기간적(성탄절·설날 등) 예외가 일시 설정되기도 하였으나 야간통행금지는 국민생활의 ‘원칙적인’ 제약형태로 작용하다가, 전두환 정부에서 1982년 1월 5일부로 이를 해제하였다. 그러나 1994년 개정 『경범죄처벌법』에서 내무부장관이 아닌 경찰청장이 야간통행제한을 정할 수 있도록 한 점을 제외하면 2020년 현재까지도 제한의 법률상의 근거는 동일하게 남아 있다.
(2) 미곡의 자유시장 (일반고시1호)
진주 초기 미군정은 시장의 전면적인 자유화로써 일제강점기의 수탈을 받았던 한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이는 10월 5일 일반고시 제1호 『미곡의 자유시장』으로써 실행되었고, 이어 10월 20일 연초·염·아편·인삼 등 몇몇 전매종목을 제외한 생활필수품 시장을 전면 자유화한 일반고시 제2호 『Free Commodity Market(국문명 없음)』로도 이어졌다.
전개과정이 유사하므로 전자만을 살펴보면, 그 골자는 미곡의 자유판매와 가격형성을 제한하는 일제의 규제를 철폐한 데 있었다. 다만 시장의 안정화를 위해 일본인·일본지배기업 소유 미곡은 조선생활필수품회사(구 식량영단)에 판매하도록 하였고(제2조), 자유화에 따라 미가가 급격이 폭락할 것을 우려하여 정조(定租) 54kg당 32엔이라는 가격에는
註02 군정 당국이 수량을 불문하고 매입할 것을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최저가격을 설정하였는데(제3조) 이는 더 이상 日帝의 공출이 없는 상태에서 10월 이후 추곡이 풍부히 생산될 것이라는 진주 초기 미군정 당국의 낙관적인 전망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과 정반대로 10월 이후 격심한 인플레이션과 함께 쌀은 오히려 품귀현상을 보였는데,
註03 그 이유로는 ① 미군정 당국의 부족한 정보 및 행정력, ② 해방 전후 일본의 조선은행권 남발로 인한 통화격증, ③ 귀환동포의 급증에 따른 인구의 폭증, ④ 시장자유화에 따른 매점매석을 단속할 법적 근거의 부재 등이 지적되고 있다.
註04
- 註02
- 이와 같은 가격의 설정경위에 관하여는 원용석, 『한국의 식량문제』, 1957, 164-165쪽(김점숙, ‘미군정기, 국내산 생필품 통제 정책’, 『사학연구』 제105호, 2012, 282쪽의 각주 26번에서 재인용).
- 註03
- 1944년에 비해 1945년 8~12월의 서울시내 생활필수품 소매물가는 약 2,445% 상승하였던 반면, 봉급수준은 21%(은행원)~325%(공무원) 증가하는 데 그쳤다. 통계청 편, 『통계로 본 광복전후의 경제·사회상』, 1993, 20-21쪽.
이후 미군정청은 전술한 군정법령 제19호 「국가적 비상시기의 선포」(1945.10.30.)의 내용에 세칭 ‘謀利’ 행위의 불법화를 포함한 데 이어 일반고시 제6호(1945.11.19.)에는 미곡에 대한 최고소매가격을 지정하도록 하였으나 이로써 미가의 앙등에 따른 매점매석 행위를 실효적으로 단속할 수는 없었고, 만성적인 식량·물자의 부족사태에 봉착한 군정 당국은 1946년 상반기부터 「미곡수집」과 「경제통제」을 통해 순차 배급분배를 통한 경제회생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정책노선을 수정하게 되었다.
(3) 국가적 비상시기의 포고 등 (법령19호)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이 1945년 10월 30일자로 공포한 군정법령 제19호는 미군 진주 초기에 공포했던 후술 「미곡의 자유시장」(일반고시 제1호)와 「일반노동임금」(군정법령 제14호)를 통하여 시도했던 경제적 전면자유화 정책의 시행 결과가 초기부터 실패로 나타나면서 군정당국이 일반적인 통제정책으로 선회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먼저 “국가적 비상시기의 포고”를 표제로 하는 제1조에서 군정청은 최근 경제적 난관의 원인을 철수 이전 일본의 실정에 기인한 것으로 진단함으로써 군정당국의 무과실을 강조하고, 경제난을 해소하기 위하여 한시적으로 “강력한 비상조치”를 설정한다고 포고하고 있다. 슈미트(Carl Schmitt)의 용어법에 따르면 ‘주권적 독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이 비상조치의 포괄성은 제4조에서 특히 잘 나타나는데, 군정청을 기만하거나 그 명령·계획을 방애(防碍)하는 자, 그리고 군정에 협력하는 자의 기율행위에 간섭하거나 그를 공갈·편취하는 일체의 행위를 점령재판소에서 처벌할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제3조는 위 「미곡의 자유시장」의 1차적인 실패요인으로 세칭 모리배(謀利輩)를 지목하여 폭리취득을 불법화하는 조항이다(이에 관하여는 아래 「미곡의 자유시장」(일반고시 제1호) 항목 해제도 참조). 이 조항은 1950년대까지 ‘폭리취체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폭리행위 단속(구 용어로 ‘취체’)의 근거로 기능하다가,
註05 이 법령에 대하여는 4.19 이후 정부발의로 폐지법률안이 국회에 상정되었으나 5.16으로 회기불계속 폐기되었고,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구법령정리사업’을 통해 1961년 12월 31일 법률 제943호 「폭리행위등취체규칙및군정법령제19호제3조폐지에관한법률」에서 폐지되었다.
제2조와 제5조는 각각 노동·언론부문에 대한 개별적인 통제를 규정하고 있다. 먼저 제2조에서 군정법령 제19호는 ‘방해 없이 근무할 권리’를 보호해야 하므로 이를 방해하는 행위는 불법이라는 전제 하에, 노동쟁의는 군정청에서 설치한 중재소에서 종국적 구속력을 가지고 강제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그 동안에도 조업의 중단·감축은 할 수 없도록 규정함으로써 이후 헌정사에서 오래도록 나타난 강재중재 제도의 해방 이후 첫선을 보이고 있다.
또한 제5조의 경우 훗날 허가제로 선회한 군정법령 제88호(아래 해제 참조)와 달리 신문·출판물의 등기제만을 규정하였다는 점에서 군정당국이 점령 초기에 언론자유를 전면 보장하였다는 주장의 근거로 흔히 원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래에서 보는 군정법령 제55호 「정당에 관한 규칙」에서 군정청이 일시 채택했던 신고제를 등록제로 전환한 맥락과 마찬가지로, 이 군정법령에서 규정한 등기제는 언론매체와 언론인에 관한 정보를 군정청이 효율적으로 집적하고 추후 통제의 기초자료를 마련하기 위한 예비적 조치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보다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등기사항에 신문 등 출판물의 명칭·발행장소와 같은 일반사항뿐만 아니라 실질적 지배주 등 이해관계인, 재원(財源) 등 순전한 민사관계에 관한 사항까지 등록하도록 한 데서 알 수 있다.
(4) 경전(京電) 용원(傭員)의 불법동맹파업 (선포령6호)
1948년 3월 15일 군정장관이 발한 선포령 제6호는, 위 군정법령 제19호 「국가적 비상시기의 선포 등」 제2조가 적용될 수 있는 구체적 양태를 보여주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1948년 3월 11일 대한노총 경전노동조합 조합원들은 군정당국과 서울전기회사(京電) ① 잔업수당 지불, ② 일부 간부의 사퇴를 요구조건으로 제시하고 12일 오후 5시까지 회답할 것을 최후통첩으로 요구하였으나 사측에서 이를 묵살하자 13일 전차의 전량 운행중단을 포함한 파업을 시작하였다.
註06 이로 인해 서울시내 전역의 전차운행이 마비되자 군정장관 딘(William F. Dean) 소장은 선포령 제6호를 발하여 이 동맹파업은 불법이며 3.17.까지 업무에 복귀하지 않는다면 군정법령 제19호 위반으로 처벌할 것이라고 통첩하였다.
註07 그러나 이 날까지 노동조합원들 중에서는 일부만 업무에 복귀하였고,
註08 결국 노측에서 3월 20일 아침부터 전원 업무에 복귀함으로써 해방 이후 최초의 전철파업은 일단락되었다.
(5) 법률제명령의 존속 (법령21호)
1945년 11월 2일 공포·시행된 군정법령 제21호(특정표제 없음)가 가진 의의는 그 전인 1945년 10월 9일 제정된 군정법령 제11호(특정 표제 없음)와의 연관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군정법령 제11호는 우선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악법으로 꼽히던 ① 정치범처벌법, ② 예비검속법, ③ 치안유지법, ④ 출판법, ⑤ 정치범보호관찰령, ⑥ 神社法, ⑦ 그리고 경찰사법권을 규정한 범죄즉결례를 폐지하였다(제1조). 그밖에도 ‘일반법령의 폐지’라는 표제 하에 “사법적 또는 행정적 적용으로 인하여 종족, 국적, 신조 또는 정치사상을 이유로 차별을 生케 하는” 법령을 전부 폐지한다는 조항이 있었으나 이는 실제에서 적용되는 사례가 거의 없었다(제2조). 한편 이 법령은 죄를 규정한 행위시의 법률이 없으면 처벌할 수 없다는 죄형법정주의 원칙을 규정하기도 하였으나(제3조), 위 특정 법령들이 폐지됨에 따른 형사법상의 공백은 군정당국의 “포고·명령·지시를 범한 자”나 “공중치안·질서를 교란한 자, 정당한 행정을 방해하는 자” 등을 광범위하게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한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 제2호로써 메워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군정기에 처벌을 억제하는 죄형법정주의의 실효성은 반감되어 있었다.
군정법령 제21호는 이러한 규범상태를 전제로, ‘그간 이미 폐지된 것을 제하고’ 1945.8.9.까지 조선에 적용 중이던 일제강점기 법령의 효력을 군정청의 별도 폐지조치가 없는 그대로 존속시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했다. 그로써 민법·형법·각종 소송법 등 기본법률들이 해방 전의 상태대로 1948년 헌법제정 당시까지 依用되었고, 동 헌법 또한 “현행 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함으로써(제100조) 이들 법령은 그 뒤로도 대한민국의 새 법령으로써 점진적으로 대체해야 할 대상으로 남았다. 이러한 구법령 정리사업은 이승만 정권기에 더디게 진척되다가, 5.16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1961년 7월 15일 『구법령정리에관한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내각에 법령정리위원회를 구성하고 여기서 1961년 12월 31일까지 새 법령으로 대체하지 못한 구법령은 일괄폐지된 것으로 간주하도록 규정한 뒤 대다수의 구법령을 적어도 우리 법령으로 대체함으로써 적어도 형식면에서 비로소 일단락되었다.
(6) 조선에 입국 또는 출국자 이동의 관리 급 기록에 관한 건 (법령49호)
1946년 2월 19일 제정(3월 1일 시행)된 군정법령 제49호 「조선에 입국 또는 출국자 이동의 관리 급 기록에 관한 건」은 조선에의 출국 또는 조선으로의 입국 절차에 관하여 규정한 해방 이후의 첫 법령이다. 정부수립 이전이기 때문에 출국의 자유가 인정되지는 않았고 외국여행을 위해서는 외국여행증명서를 군정청 외무과로부터 발행받아야 했고(제2조), 이를 위한 신청원에는 출국신청의 이유, 여행 예정경로 등을 기입해야 했다(제3조). 한편 입국하고자 하는 자는 입국의 이유·목적, 여행 예정경로 및 기간 등을 외무과에 통지해야 했다(제4조). 현행 출입국관리법에 대한 원형에 해당하는 최초의 법령이라는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7) 법령 제49호의 개정 (법령214호)
1948년 7월 30일 위 군정법령 제49호 「조선에 입국 또는 출국자 이동의 관리 급 기록에 관한 건」은 군정법령 제214호로 전부개정되었는데, 위 종전 법령에서 규정하던 여행증명서 등 구체적인 입국절차에 관한 규정은 모두 같은 날 제정된 외무처 처령 「남조선 출입국자에 관한 취체」(1948.7.30. 제정)로 옮겨 규정하였고, 군정법령 제214호는 군정청의 기구(외무처, 재무부 세관국, 도·시 내무국)의 직무영역을 배분하는 내용을 규정하는 한편 외무처의 규칙제정권에 대한 근거만 규정하는 조직법규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변모하였다.
(8) 남조선 출입국자에 관한 취체 (외무처처령제1호)
1948년 7월 30일 제정되어 8월 1일부터 시행된 외무처 처령 제1호 「남조선 출입국자에 관한 취체」는 기존의 군정법령 제49호 「조선에 입국 또는 출국자 이동의 관리 급 기록에 관한 건」에서 규정했던 출입국의 절차에 관한 사항을 보다 구체화하여 출입국의 허가 및 그 거절의 요건을 상세히 규정하였다. 한편 제2조 가.항에서는 ‘조선인’의 정의(定義)를 규정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남조선과도정부법률 제11호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 제2조의 그것과 동일하다.
이 법령과 전술한 군정법령 제214호 「법령 제49호의 개정」은 모두 1949년 11월 17일 법률 제65호 「외국인의 입국·출국과 등록에 관한 법률」로 대체되었고, 동법은 1963년 3월 5일 법률 제1289호 「출입국관리법」으로 다시 대체되어 지금에 이른다.
(9)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 (남조선과도정부법률11호)
내·외국인의 출입국 문제와 별개로, 정부수립 이전이라 하더라도 조선의 국적에 관한 기준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은 일제강점기의 창씨개명 정책으로 인해 일본인과 조선인의 호적이 혼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특히 적산처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예비작업을 위해서도 존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군정청의 의뢰에 의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그에 대한 제정논의를 하게 되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제188차 회의(1948.1.12.)에서 초안을 낭독한 뒤 제197차 회의(1948.1.27.)에서 제1독회, 제204차(1948.2.17.)·제212차 회의(1948.3.19.)에서 제2독회를 마친 뒤 제3독회를 생략하고 통과시켰고, 이를 군정장관이 1948년 5월 11일 공포하였다.
이 법률은 출생에 의한 조선 국적의 취득요건을 1차적으로 “조선인을 부친으로 하여 출생”하였는지의 여부에 따라 가리는 부계혈통주의를 취하고 있었고 이러한 태도는 이후 1997년 국적법이 개정되어 부모양계혈통주의가 채택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대법원은 1996.11.12. 선고 96누1221 판결에서 “조선인을 부친으로 하여 출생한 자는 남조선과도정부법률 제11호에 따라 조선 국적을 취득하였다가 제헌헌법의 공포와 동시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다”고 판시함으로써, 남북한에 각각 헌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제정되었던 이 법률을 매개로 하여 북한이탈주민의 대한민국 국적을 인정한 바 있다.
(10) 정당에 관한 규칙 (법령55호)
1945년 9월 8일 한반도에 진주하여 성립한 미군정은 9월 17일 성명 「정당은 오라」를 통해 일시 정당에 대한 신고제를 취하다가, 1946년 2월 23일 군정법령 제55호 「정당에 관한 규칙」을 통해 이를 등록제로 전환하였다. 허가제와 대비하여 등록제라는 법형식은 표면상 좌우의 이념적 정향에 관계없이 정당활동을 균등하게 허용하는 것처럼 보였고, 특히 그 구체적인 범위는 추후 조율되어야 할지언정 남북 점령지역 각각의 좌우 정치·사회단체가 참여할 것을 예정하고 있던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하기 위하여 이러한 법형식은 필요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10월 17일 맥아더에게 하달된 「한국의 미군 점령지역내 민정업무에 대하여 태평양방면 미군최고사령관에게 보내는 초기 기본지령」(SWNCC 176/8)에서 “모든 정치단체 및 결사를 통제 아래 두고 군정의 이해와 일치하는 것은 지원하되 이에 반하는 것은 제거”하도록 지시하고 있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미군정의 정치단체에 관한 정책은 처음부터 통제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고 이는 군정법령 제55호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 법령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정치적 활동을 행할 목적으로 어떤 형식으로나 정치적 활동에 종사하는 자로써 된 3인 이상의 각 단체’는 모두 정당으로 등록하도록 하고, ‘이러한 정치적 영향을 미치기 쉬운 활동을 은밀히 행하는 단체 또는 협회’ 즉 비밀 정치결사를 모두 금지하는 한편(제1조) 당원의 비밀입당도 금지하였다(제3조 가.항). 또한 정당에 대하여 당원 이외 출처로부터의 직·간접적인 재정원조를 일체 금지하는 한편(제3조 가.항) 그 자금회계(제2조 나.항)와 모든 당원의 주소를 기입한 명부(제3조 나.항)까지 모두 등록사항으로 함으로써 군정청이 정치결사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장악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군정법령 제55호의 실효성을 관철하기 위해 군정청은 1946년 4월 2일 각 도에 통첩을 보내어, 정당 사무소가 등록하지 않거나 이 법령을 위반한 경우에는 해체명령을 내리도록 지시하였고,
註09 군정당국의 좌익에 대한 탄압이 가시화되면서 이는 좌익계열 정당·사회단체에 대하여 등록을 거부한 뒤 미등록을 이유로 해산을 강행하는 운영형태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58년 2월 25일 공보실에서는 이 법령을 근거로 하여 진보당을 등록취소 및 해산하였다.
군정법령 제55호는 아래에서 볼 군정법령 제88호와 함께 정부수립 이후로도 존속하면서 1960년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개혁대상으로 지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4.19 이후 민주당이 다수당이 된 국회에서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없이는 정당을 강제해산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을 헌법(제13조 제2항)에 신설하고, 1960년 7월 1일 법률 제553호 「신문 등 및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는 한편, 1960년 10월 13일 법률 제558호 「정치운동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정당원 등 정치운동 종사자에 대한 체포·구금 및 살해·상해·폭행·협박 등 행위를 처벌하면서 이 법률로써 군정법령 제55호를 폐지하였다.
(11)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의 허가 (법령88호)
종래의 군정법령 제19호 「국가적 비상시기의 포고 등」에서 등록제를 규정했던 데서 나아가, 1946년 5월 29일 공포·시행된 군정법령 제88호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의 허가」는 외국간행물을 포함한 신문 등 정기간행물에 대하여 발행목적, 법인인 경우 주주 전원의 성명·주소, 담보권자의 성명·주소 등을 포함한 사항을 포함한 신청서를 제출하여 발행허가를 받도록 하고, 허가사항에 대한 변경이 있는데도 그에 대한 변경허가를 받지 않거나 ‘법률에 위반이 있을 시’(제4조 제1항 다.목)에는 허가를 취소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그 도입의 실질적인 취지는 군정당국이 좌익계열의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 법령은 정부수립 이후 10년 이상 적용되는 사례가 없었으나, 1959년 4월 30일 이승만 정부의 공보실에서 『경향신문』을 폐간하는 근거규정이 됨으로써 당시 수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군정법령 제88호는 군정법령 제55호와 더불어 민주당의 대표적인 폐지대상인 ‘군정 악법’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4.19 이후 민주당이 다수당을 이룬 국회에서는 법률 제553호로 「신문 등 및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신문 등 정기간행물에 대한 등록제로 회귀하였다.
(12) 군정위반에 대한 범죄 (법령72호)
군정장관 러취가 1946년 5월 4일 군정법령 제72호로 공포한 「군정위반에 대한 범죄」는 군정위반에 대한 범죄의 유형으로 81가지의 죄를 규정하고(제1조) 그 기도·음모행위도 처벌하며(제3조) 법인의 임직원의 위반행위에 대하여는 법인에도 형을 과하도록 하는 양벌규정을 도입하였다(제4조). 열거된 범죄행위의 대표적인 유형으로는 ① 주둔군 또는 그 명령 하에 행동하는 자의 직무수행을 방해·불복종하는 일체의 행위, ② 공용 시설물에 대한 파괴·절취 등 기능훼손 행위, ③ 금지된 약물·통화 등 물품의 소지행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행위를 열거한 제1조는 1945년 9월 7일자 태평양미국군총사령부포고 제2호 또는 지금까지 공포된 법령 “외”에 위 81가지 죄를 처벌한다는 것이어서 그 광범위성에 대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시행된 지 한 달 반이 채 되지 않은 1946년 6월 17일 대법원장 김용무가 “군정법령 제72호는 당분간 정지하게 되었다”고 발표한 데 이어 다음날에는 군정장관 러취가 이 법령의 시행을 “재검토할 목적으로 보류”하기로 했음을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註10 이 자리에서 러취는 이 법령의 제정취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법령 72호는 일반국민이 맥아더 장군 포고 제2호에 대하여 어떤 행위가 위반행위가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는 불평이 있기 때문에 발포한 것이다. 죄목을 더 추가하기 위하여 이 법령이 생긴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조선인 사이에는 이 법령 발포로 말미암아 상당히 놀란 것이 분명하다.” 그 뒤로 이 법령이 적용된 사례가 확인되지는 않으며, 동법이 형식상으로도 폐지된 것은 1948년 4월 8일 군정법령 제183호 「필요없는 법령의 폐지」에 의해서이다.
(13) 경제통제 (법령90호)
한반도 진주 초기 미곡 등 생활필수품에 대한 가격자유화 정책을 폈던 미군정은 그에 따른 가격앙등에 대응하여 석탄에 대한 일반고시 제3호(1945.11.5.), 어업장비에 대한 일반고시 제4호(1945.11.24.), 석유생산물에 대한 일반고시 제5호(1945.12.15.)로 개별 품목에 대하여 특정 법인을 통제기관으로 지정하여 그 배분에 대한 통제를 시도하는 한편 미곡에 대하여도 일반고시 제6호(1945.11.19.)로 미곡에 대한 가격상한제를 도입하였으나, 이로써 전반적인 인플레이션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군정청은 경제 전반에 대한 통제노선으로 선회하기에 이르는데, 이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46년 5월 28일 군정법령 제90호 「경제통제」이다.
이 법령에서 군정청은 위 일반고시 제1호 내지 제6호를 모두 폐지하고, 군정청 그 산하에 중앙경제위원회(제2조), 중앙가격행정처(제4조), 중앙식량행정처(제5조)를 신설하며 이들 기관이 발포한 규칙에 위반하는 자는 처벌하도록 하는 한편(제8조), 군정장관과 중앙경제위원회에 대한 자문기구로 종래의 조선경제자문위원회의 기능을 강화하였다(제3조).
이와 같은 통제경제로의 전환은 특히 추곡에 더하여 하곡까지 군정청에 공출하도록 하는 미곡수집 및 분배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그에 관하여는 후술 「미곡수집」 관련 항목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