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54년 5.20 총선과 개헌의 배경
(1) 제3대 총선거와 자유당의 선거전략 : 개헌안의 연계
① 자유당의 개헌안 연계 선거전략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총선거 과정에서 이승만과 자유당은 이미 개헌을 준비하고 있었다. 개헌안 발의는 1952년 7월 발췌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직후에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1952년 7월 17일, ‘국회의원 소환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 개정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 함태영 부통령을 중심으로 ‘헌법연구회’를 구성할 계획까지 세웠지만, 이 개헌논의는 자유당 국회의원 포섭공작이 진행됨에 따라 지지부진해졌다.
자유당은 개헌안과 제3대 총선거를 연계하여 진행하였다. 선거운동의 주요기구로 개헌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전국적인 개헌추진국민대회를 개최했다. 개헌추진위원회는 자유당, 민중자결단, 국민회 대표 등 대중단체와 함께 구성되었고, 선거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註01 개헌추진위원회가 개최한 전국 규모의 개헌추진국민대회에서는 5개 항의 개헌 내용을 국민의 이름으로 지지한다고 표명하도록 했다. 이승만과 자유당이 선거운동 과정에서 공개한 개헌안의 일부 내용은, “첫째, 정·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하되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 단 초대 대통령은 차한에 부재한다. 둘째, 헌법개정 및 국가구성요소의 변혁은 유권국민 3분의 2 이상의 결의 없이는 할 수 없다. 셋째 선거민에게 양원 의원에 대한 소환권을 부여한다. 넷째, 정부에게 민의원 해산권을 부여한다. 다섯째, 헌법 제6장 경제조항을 개정한다.”는 것이었다.
註02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총선거에서는 전국적인 지방조직을 갖춘 자유당이 여당으로 공식적으로 등장하여 선거에 참여하였다. 이 선거의 특징은 정권의 무제한적 개입이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이승만정권의 강력한 통제력이 형성된 가운데 관권과 금권을 동원한 선거 부정이 심각했다. 경찰간부들의 자유당 후보 선출 강요, 통반장들의 호별 방문, 도지사의 지시 등 노골적인 형태의 관권개입이 이루어졌다.
註03 자유당은 총선거 과정에서 개헌에 방해되는 인물과 차기 대권후보 등 야당의 주요 인사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에 따라 2대 국회에서 내각책임제를 제안한 후보들은 입후보조차 할 수 없도록 강요하고, 조봉암, 신익희, 허정, 조병옥 등에게도 정치보복과 정치공작을 벌였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입후보자의 등록 방해, 입후보자 사퇴 압력, 경찰의 직간접적 개입, 괴청년단체의 협박이나 선거운동원에 대한 테러, 행정부의 투·개표 과정의 불법행위 등이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註04
자유당은 3대 총선거부터 공천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야당인 민국당도 일부 후보를 공천했지만 국회의원 입후보를 위해서 정당공천이 법적 요건은 아니었다. 정당공천제는 한 당에서 여러 후보가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난립하는 것을 방지하는 선진적인 제도이지만, 이 선거에서는 개헌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공천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註05 공천에는 이승만의 의사가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선거 전 이승만은 현직 국회의원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註06 그리고 개헌을 지지하는 조건으로 자유당 국회의원 후보 자리를 준 것이다. 3대 총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의 선거 구호 1번이 개헌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 註05
- 김진흠, 2021, 「이기붕 체제 자유당의 형성과 변화」, 『사림』 제75호, 244쪽; 이승만 담화, 「개헌 조건부로 입후보케 하라」, 공보실 편, 『이승만대통령담화집』2, 쪽.
제3대 총선거의 경우 자유당 공천 조건이 개헌에 대한 동의 여부이므로 선거 결과 자유당 의석수는 개헌동의 여부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자유당이 전열을 갖추어 선거에 임한 데 비해 야당은 전쟁이 끝난 후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조직력을 제대로 갖출 수 없었다. 따라서 선거의 쟁점은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개헌에 대한 동의여부와 정부에 대한 지지와 반대였다.
註07
② 정부의 헌법 경제조항 개정안 제출과 철회
정부는 1954년 1월 23일 경제조항개정안을 제출했다. 건국헌법은 기간산업 및 주요산업의 국공유화, 사영기업의 국유화 등의 비자본주의적 요소들을 대폭 도입하고 있었다.
註08 이는 광범위한 국유화와 사회화의 규정 하에 공공복리를 위해 국가가 시장에 깊이 개입할 수 있음을 규정한 것이었다. 주요 생산수단에 대한 국유 내지 국영원칙은 당시 엄청난 비중을 점하던 귀속재산과 관련이 있었다. 정부로서는 미군정으로부터 넘겨받을 막대한 재산을 맡아서 관리할 법적 근거가 필요했으며, 그것이 헌법의 경제조항에 주요 생산수단에 대한 국유 및 국영의 원칙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註09 또한 우파세력이 중심 정치세력이었던 제1공화국의 헌법이 이러한 경제정의 조항을 유지한 것은 일제 강점기의 경제적 불평등과 북한 공산정권 경제적 평등주의에 상징적 차원에서나마 대처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註10
해방과 전란으로 인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한 의도로 정부는 헌법 경제조항 개정을 시도했다. 개헌은 4개의 경제조항에 한정된 것으로, 사기업에 의한 개발과 외자유치를 위하여 통제경제적인 헌법조항을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의 경제조항 개정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註11
첫째,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수력 등 자연력의 처분·채취·개발 또는 이용에 관한 것은 법률로 정하여 소유경영 내지 이용관계로 융통성 있게 하고,
둘째, 중요한 운수·통신·금융·보험 등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고, 예외적으로 사영을 특허하며 대외무역의 국가통제의 기준을 법률로써 제정하며,
셋째, 국방상 또는 국민생활상 긴요함으로 인하여 법률을 제정하여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경영을 통제나 관리할 수 없게 한다.
제의 이유로서, 현행헌법이 일면 자유주의경제의 장점인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면서 한편 사회주의적인 균등의 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의 통제경제를 규정하고 있으므로, 중요자원과 중요기업은 국유 국영제도가 원칙으로 되어 있어서 헌정 5년 동안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보다는 폐단을 노정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경제의 후진성에 있으므로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의 자유와 창의의 귀중성을 체험시켜서 생산력의 고도증강 국가경제의 발전을 기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 개헌안이 공고된 다음 국회는 공고기간을 이용하여 법제사법위원회 주최로 서울·부산·대구·광주 등지에서 공청회를 갖고 찬반여론을 청취한 다음 2월 25일 제26차 본회의에 상정하여 3월 4일까지 연5일간에 걸쳐 질의토론을 벌였다.
註12 질의토론에서 나온 반대의견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 경제가 헌법이 조문을 고친다고 해서 발전될 수 있는가?
둘째, 전시하의 경제체제는 오히려 통제체제로 나아가고 있는데, 개헌을 통해 자유경제체제로 갈 필요가 있는가?
셋째, 외국자본에 의한 국내시장지배 등의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넷째, 현행헌법이 철저한 자유경제체제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유경제체제로 전환하겠다는 것은 결국 독점경제를 지향하겠다는 의도이다.
註13
반면 찬성의견은 다음과 같다.
첫째, 통제경제로부터 자유경제로의 완전 전환은 아니다.
둘째, 개헌을 하더라도 균등사회 실현을 위한 법적 제도적 근거는 층분하다.
셋째, 경제파탄 상태로 인해 외자도입은 당장 절실하다.
넷째, 외자에 의한 경제침략보다는 외려 개헌을 하더라도 얼마만한 외자가 들어올지 우려스럽다. 경제침략 역시 법률적으로 충분히 규제할 수 있다. 외자를 무서워하는 것은 일부 편협한 쇄국주의, 국수주의자들의 자살행위적 애국론에 불과하다.
다섯째, 국유화 조항이 외자도입을 가로막고 있음으로 경제파탄을 개헌을 통해 타개하겠다는 주장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여섯째, 기업의 자주성과 창의성이 절실하기 때문에 개헌은 필요하며, 기업·자본·시장 독점의 우려는 정책으로 규제할 수 있다.
註14
이승만은 이 개헌을 추진하기에 앞서 족청계를 제거하고 자유당을 재편하고자 했다. 자유당 내 이기붕, 이갑성 등 새로운 연합체제를 형성하며 족청계를 제거한 후 원내자유당 세력을 흡수했지만, 확대된 자유당은 쉽게 통제되지 않았다. 이때 국회의 세력분포는 자유당이 102명, 민주국민당은 22명, 무소속 55명으로, 개헌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자유당 의원들이 행동통일을 하더라도 20명 이상의 의원을 포섭해야 했다.
이승만은 “천하에 처음 보는 국회에 중대한 개헌을 맡길 수 없다”는 담화를 발표한 후 3월 9일 개헌안의 철회를 요구하였고, 국회는 3월 15일 이를 승인했다.
註15 백두진 총리는 임기 만료를 앞둔 2대 국회에서 처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점을 철회 이유로 제시했다.
註16 이때 이승만 정부가 경제조항 개헌을 추진한 데는 미국과의 관계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미국은 한국의 경제질서가 사적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는 사기업 중심을 지유경제체제로 나아가기를 원했으며, 이것이 외자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전제라고 보았다. 따라서 본격적인 전후 원조의 실행을 앞둔 한국 정부가 미국을 의식하여 경제조항 개헌안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경제조항 개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정의 취지를 실해하려는 한국 정부의 의지라고 보았다.
註17 이때 철회한 경제조항은 1954년 9월 정부가 개헌안을 제출할 때 포함되어 통과되었다.
- 註16
- 그러나 실제 철회 이유는 총선을 앞두고 정부 정책의 실패를 부각시키려는 민국당과 공천제를 통해 당내 권력구조를 재편하고자 했던 자유당의 내분으로 인한 것이었다(신용옥, 2008, 「대한민국 헌법 경제조항 개정안의 정치·경제적 환경과 그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2008년 봄호 제44집, 279, 292쪽).
(2) 자유당의 득세와 의원포섭 공작
선거 결과 자유당은 공천 후보 99명, 비공천 후보 15명이 당선되어 총 114석을 획득했다. 민국당은 15석, 대한국민당 3석, 국민회 3석, 기타 1석, 무소속이 67석이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집계한 득표 비율로 보면 자유당 36.7%, 민국당 7.9%, 무소속이 47.9%로, 자유당보다 무소속 비율이 높았다.
註18
자유당은 경기·강원·충청·충북 각 도에서는 압도적으로 승리했으나 경남·경북·전남·전북 각 도에서는 반수를, 서울시에서는 겨우 3분의 1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제2대 국회 말기의 자유당원내세력을 형성하던 주요 인사들이 낙선한 반면, 원외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기붕과 정부 요직에 있던 인사들이 대거 등장하고, 민국당은 신익희·조병옥·윤보선 등 거물급과 소선규·김상돈·신도성 등 쟁쟁한 인물들이 원내 진출했다.
제3대 총선거 결과 표면적으로는 자유당이 승리하고 민국당의 철저한 패배로 드러났다. 자유당의 공천제도의 영향으로 무소속 국회의원도 이전 총선거에 비해서 감소했다. 헌정사상 최초로 여당이 지배하는 국회가 성립되었지만, 자유당은 개헌 정족수인 정원 203석의 3분의 2인 136명에는 미치지 못했다. 선거 전 개헌과 공천을 연계하였으므로, 개헌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후 개헌 정족수 확보를 위한 자유당의 의원 포섭공작이 진행되어 1954년 6월 9일 제3대 국회가 개원할 때 자유당은 127석을 확보했다.
의석수 우위를 토대로 자유당은 제3대 국회의장에 이기붕, 부의장에 최순주가 선임되었고, 상임위원장 14석도 자유당이 독점했다. 국회의장 투표에서 자유당 이기붕이 124, 민국당의 신익희가 52, 무소속의 장택상이 15, 대한국민당의 윤치영이 7표를 얻었는데, 이 득표수가 국회 내 여·야 세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유당은 의원 포섭공작을 계속하여 교섭단체등록 시인 6월 16일 개헌 정족수인 136석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무소속의원 일부는 무소속동지회로 30명이 모이고, 민국당은 교섭단체 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나머지 무소속 36명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註19
2. 자유당의 개헌안
(1) 자유당의 개헌안 제출
정부와 자유당은 1954년 5.20 총선거 이후 정부기구개편을 등을 중심으로 하는 개헌안을 추진하기 위해 헌법개정초안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개헌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개헌의 주요 내용은 ‘국민투표제 채택, 국회의원 소환제, 국무총리제를 국무장관제로 변경, 대통령 궐위 시 잔여임기는 부통령이 대리하고 부통령 궐위 시 부석국무위원이 대리, 경제조항 개정 등의 5개 조항으로 정리되었다.
註20 그러나 5.20 총선거에서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자유당은 개헌안 통과를 위해서 불안정한 당내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승만이 지시한 국회의원 소환제를 개헌안에 포함시킬 경우 자유당 내에서도 이탈자가 생길 것을 우려했다.
註21
국회에서 국무원 신임안이 통과된 이후 7월 9일 정부 여당 연석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개헌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개헌 주도권을 두고 여당인 자유당과 각료 사이에 주도권 경쟁이 촉발되었다. 정부와 여당 사이에서 가장 쟁점 사항은 국회의원 소환제로, 자유당 일부와 무소속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개헌안 초안 구상 단계에서 제외되었다.
이때 대통령 궐위시 부통령에게 ‘승계권’을 부여하는 항목이 추가되었다. 승계권 규정은 부통령 후보로 예측되는 이기붕과 주류파의 정치적 이해를 담보하는 것이었다. 또한 국무총리제 폐지 대신 국무위원 개개인의 임명에 대한 인준권을 삽입하여 의원과 국회의 행정부 견제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註22
정부와 자유당이 협의하여 개헌 초안을 마련하여 협의한 후 이승만의 동의를 받아 9월 2일 개헌안 서명에 착수하였다. 자유당은 1954년 9월 6일 이기붕 외 135명의 서명으로 개헌안을 제출하고, 정부는 이틀 후인 9월 8일 이 개헌안을 공고했다.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권의 제한이나 영토의 변경 등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사항에 대하여는 국민투표 실시, 둘째 국무총리제를 삭제하고 국무원의 연대책임제를 폐지하며,
셋째, 참의원에 대법관 등 법률에 의해 지정된 공무원 임명 인준권을 부여하고,
넷째, 경제체제의 중점을 국유국영의 원칙으로부터 사유사영의 원칙으로 이전하며,
다섯째, 대통령 궐위 시 국민이 직접 선거한 부통령으로 하여금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하되 3개월 이내에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거케 하며,
여섯째, 현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철폐할 것 등이었다.
그 외에도 헌법회의의 헌법적 근거 명시, 국민에게 헌법개정제의권의 부여, 양원의 권한관계를 명백하게 하고 혹은 변경할 것, 국회의 탄핵소추의 발의 및 의결종족수를 저율로 할 것, 그리고 헌법개정의 한계를 규정한 것 등 광범위했다.
註23
개헌안 공고기간 동안 야당은 반대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야당계 신문들은 연일 개헌 반대 이론을 내세워 자유당을 공격했다. 민국당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개헌안 공청회 등을 열고 반대여론을 불러 일으켰다. 무소속동지회 소속 의원 30여명도 총회를 열고, 이 개헌은 이승만의 영구 집권이 목적이며, 국민투표제니 자유경제체제니 하는 것은 미끼일 뿐이라며 만장일치로 개헌에 반대했다.
무소속동지회는 개헌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국정만반의 혼란과 민생의 고난을 가져온 정치적 원인은 정부 스스로가 법질서를 유린하고, 관료독선 행정적으로 이도가 부패되고, 행정각부의 연대책임의 결여로 종합적인 정책수행을 불가능케 한 데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개헌으로서, 첫째, 국가원수와 행정권을 완전히 분리하고, 둘째, 내각연대책임 하에 내각은 의회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셋째, 내각에 의회해산권ㅇ르 부여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하는데, 현 개헌안이 성립된다면 정계를 문란케 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절망의 구렁에 빠지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註24
이러한 반대운동에 상당수 국민들이 호응하였고, 여론도 개헌 반대로 기울어지는 분위기였다.
註25 총선거에서 참패했던 민국당은 개헌반대성명을 발표하며 반대파의 중심으로 부활했다. 민국당은 개헌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반대의견의 핵심은, 첫째 개헌은 양원 각각 재적의원 2/3이상의 찬성을 얻도록 했으나(헌법 제98조), 참의원 구성조차 하지 않은 채 부칙을 악용했다는 절차적 문제, 둘째, 초대 대통령에 한하는 중임철폐조항은 만민평등의 법칙(헌법 제8조)과 위배된다는 점, 셋째, 국민투표제가 관제민의동원과 같은 정치적 악용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註26 민주당은 “설사 헌법개정의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참의원을 구성한 후에 헌법규정의 절차대로 양원의 의결을 얻어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차 개헌 때와 달리 개헌반대운동은 민국당 주최의 개헌안토론회, 각 신문사주최의 개헌안 공청회 등 언론의 참여와 여론형성이 시도되었다.
10월 7일, 공고 기간 한 달이 지나 언제든 개헌안 상정 표결이 가능해졌지만, 자유당은 개헌안 통과를 확신할 수 없어 개헌안 표결을 미루고 있었다. 이승만은 10월 11일 변영태국무총리를 통해 개헌안을 사항별로 표결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국민투표안만 통과되면 임기문제는 국민공의에 따라 판결될 것이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자유당 간부진은 개별 사항을 통과시키기도 어려울 바에는 차라리 전체를 일거에 밀어보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추진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자기 민국당의 신익희가 월북한 조소앙과 통일문제를 협의했다는 ‘뉴델리 밀담설’이 발표됨으로써 개헌찬반 논란에 이데올로기 공세가 개입되었다. ‘뉴델리 밀담설’은 민국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인 함상훈이 ‘전 민국당 동지들에게 호소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알려졌는데, 신익희 국회의장이 1953년 6월 2일 국회의장 자격으로 영국 엘리자베드여왕 대관식 참석차 유럽 순방 길에 뉴델리에서 북한의 조소앙과 만나 한국의 중립화 통일을 논의했다는 것이었다.
註27 민국당은 성명서를 발표한 함상훈을 제명하면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민국당 내 파벌 대립으로 개헌 반대의 힘도 분산되었다.
10월 19일 이승만은 개헌문제에 대해 또다시 담화를 발표했다. 국제정세가 위급한 상황이므로 2년 전의 소위 ‘정치파동’과 같은 난국이 재연되어서는 안 된다고 엄중히 경고하면서, 이번 개헌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투표제라고 강조했다. “초대 대통령의 임기는 제한을 하지 말라는 조항은 인정치 않는다. 그러나 이 운동이 자유당의원이나 당원들이 국회에서 주장하게 되면 정당주의와 친분상 관계로 이런 운동을 하는 것같이 보이게 되면 동지들의 본의도 아니고 나에 대해서도 욕이 되지 않는 영광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우므로 이것을 국민공의에 붙여서 원만히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태도를 표명했다.
註28 다시한번 ‘국민 공의’를 내세워 자유당이 내놓은 개헌안의 통과를 압박한 것이었다.
의원들이 개헌안 통과에 찬성할 것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개헌안 상정을 미루고 있는 상황에서 자유당정책위원회는 자유당 의원의 찬성을 강제하기 위한 기명투표제 국회법 개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개헌찬성 자유당 의원조차 국회법 개정은 당지도부와 행정부의 의원에 대한 압박이라며 탈당까지 거론하는 등 강력히 반발하였다. 야당측은, “정치파동의 결산인 발췌개헌안 표결에서 기립을 강요했던 사실을 되풀이하려는 여하한 조치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과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이 문제로 국회에서는 11월 13~15일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에게 개헌안을 비롯한 사회질서 유지에 관한 질문이 있었다. 국회 심의과정에서 개헌을 주도적으로 반대한 것은 민국당이 아니라 무소속동지회였다.
註29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의회에서는 개헌안을 빨리 통과시키라는 결의문을 보내고, 지방의원들의 상경이 이어졌다. 반공전혈대 이름으로 벽보와 삐라가 뿌려졌고, 이승만의 담화도 이어졌다. 그러나 1차 개헌처럼 원외 대중동원이나 물리력에 의존하기보다 원내에서 수의 정치와 절차적 조작을 통해 개헌이 이루어졌다.
(2) 자유당 개헌안의 주요 쟁점과 의미
1954년 11월 18일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되었다. 개헌안 발의 이후 2개월 이상 지난 시점이었다. 자유당 이재학의원이 제안 설명을 한 후 질의응답이 일주일 간 이어졌다. 국민당의 조재천의원은 39개항을 2일간 계속했고, 무소속동지회에서 10명이 질의에 나섰다. 자유당에서 이재학과 장경근, 황성수 의원이 답변했다. 대체토론은 찬성과 반대를 6명씩 각파에서 지명해서 진행했다. 질의와 토론을 통해 개헌안의 중요한 내용에 대한 찬반 이유가 거의 다 표명되었다. 국회에서 진행된 질의와 토론의 쟁점은 국민투표제·국무총리제 및 국무원연대책임제 폐지·초대대통령의 중임제한 폐지·경제질서 등으로, 쟁점별로 찬성과 반대 이유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註30
먼저 국민투표제에 대한 찬성 이유로 제시된 것은, 첫째, 국가운명을 좌우하는 중요사건에 대한 최후결정권은 국민에게 부여하여 민권을 신장해야 한다. 둘째, 국제적으로 압력이 있을 때에는 정부와 국회와 국민이 삼위일체가 되어 헌법적인 효과를 가지고 막을 수 있다. 셋째, 남용 등 폐해를 배제하기 위한 안전판으로서 ‘대한민국의 주권의 제한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국가안위에 관한 중대사항’에 국한하고 반드시 국회의 가결을 거친 후에야 할 수 있고, 국민투표의 발의권을 국민에게만 부여하였으므로 부작용의 염려가 없다는 점이었다.
반대 이유로는, 첫째, 관권에 의하여 조작민의가 성행되는 데 도리어 민권을 압박하고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결과가 된다. 둘째, 외세의 압력, 기타 이유로 주권의 제약,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중대 사항을 정부나 국회가 결정을 했을 때 국민의 자유의사로 그것을 막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정부나 국회가 낸 국민투표를 원하지 않는 경우에 2개월이란 단시일 내에 50만 명을 동원하여 발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하등의 실효성 없는 무용의 지물이다. 셋째, 국회가 기결한 것을 다시 국민투표에 붙여 부결시킨다는 것은 국회를 거세 무력화하며, 직능을 상실케 하는 등 남용의 우려가 있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두 번째로 국무총리제와 국무원연대첵임제의 폐지에 대하여 찬성하는 이유로 제시된 것은, 첫째,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라는 상극하는 두요소를 혼합채택한 결과 헌정운영에 있어서 행정의 책임소재가 불분명하여졌고, 국회와 정부의 대립·마찰로 국사지연을 초래하였으므로 양자 중 하나를 채택하여 모순을 시정한다. 둘째, 아직 건국단계에 처하고 전란의 초비상시에 있어서 부흥재건의 중대과업수행에 일관성 있는 시책과 전문적·기술적·효율적인 행정운영을 함에 있어서는 안정성 있는 대통령중심제가 적합하다. 셋째, 국무원을 존치하여 각부간의 유기적인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국회에 국무위원의 개별적인 불신임권을 부여함으로서 정당정치가 아직 충분히 구현되지 못한 국민의 실정에 감하여 책임정치구현의 애로와 폐해의 발생을 제거할 수 있다는 등이었다.
반대 이유로는, 첫째, 발췌개헌 후 국무총리는 제청권을 행사해 본 일이 없고, 불신임을 해 본 일이 없는 데 혼란과 마찰을 초래했다 할 수 없고, 적용만 잘 하면 내각책임제의 좋은 실적을 얻을 수 있다. 둘째, 대통령중심제는 미국과 같은 3권의 엄격한 분립과 상호견제, 특히 사법권의 권한협소 그리고 민주주의의 전통과 정당의 발달 등의 토대가 있어야 성공적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중남미 제국과 같이 독재자의 도구로서 폭력혁명의 소인을 만든다. 셋째, 내각책임제적 요소가 다분히 채택되어 있는 현 헌법 하에 있어서도 행정부의 실질권력이 과중하여 삼권분립의 기본구조는 파멸에 임하고 정부 내 각부처간의 종합성의 결여는 행정의 무계획 무질서를 초래하여 난국의 수습을 불가능케 하고 있는데 국무원의 연대책임제를 폐지하면 입법부는 완전히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행정의 전횡과 부패의 혼란은 극도에 달할 것이라는 점 등이 제시되었다.
세 번째로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폐지에 대하여 찬성 이유로 나온 것은, 첫째, 내외다난하여 중대한 존망의 기로에 섰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우리 국민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 민족의 숙원인 민국주권하의 남북통일을 실현하는 중대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하여야 할 대통령의 최적임자로서 건국공적이 찬연한 초대 대통령이며 건국 후의 혼란기를 통하여 또는 공산침략에 항거하여 시종일관 애국지성으로 우리민족을 영도하여 온 현 이승만대통령의 계속취임을 국민이 원한다면 당선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둔다. 둘째, 미국에서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전례를 깨뜨리고 4선을 하였으며 그 후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까지만 하게 함에 있어서 당시 존재하던 트루먼대통령에게는 이 규정의 적용을 배제한 예에 비추어 특권의 창설이 아니라는 점 등이었다.
반대 이유로는, 첫째, 종신연임을 허용한다는 것은 일개인을 위하여 국헌을 변경함이 원칙상으로 불가할 뿐 아니라 일종의 특권을 설정하는 것이니 국민평등을 선언한 헌법 제8조의 규정에 저촉된다. 둘째, 후대의 대통령이 선례를 모방하여 자기에 대한 중임제한폐지의 개헌을 또다시 기도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 셋째,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헌법상의 제한이 없었고, 트루먼대통령은 헌법 개정으로 말미암아 불공평한 처지에 있으니 예외로 취급할 수 있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네 번째로 경제질서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 찬성 이유로는, 현실적으로 국가 개입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자유주의 경제원칙을 천명하여야 외국 자본 유치가 쉽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반대 이유로는, 경제정책의 실패를 자인하는 것인지, 실패의 원인을 헌법조항에 돌리는 것은 아닌지, 전시에 자유경제체제의 도입이 바람직한지 등에 대한 질문과 외국자본 도입이 국가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註31
그 외에 쟁점이 되었던 것은 양원제가 실시되지 않은 데 따른 위헌 여부에 관한 것이었다. 11월 27일 국회 제90차 본회의는 대체토론이 종결되는 마지막 날이었는데, 이날 민국당의 신도성은 현행 헌법이 양원제이므로 민의원만의 개헌은 위헌이요 불법이라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註32 헌법 제31조 2항에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으로써 구성한다’고 되어 있는데, 발췌개헌안으로 양원제를 통과시키고도 참의원을 구성하지 않은 것이 위헌이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헌법 98조 4항에는 “헌법 개정의 의결은 양원에서 각각 그 재적의원 3분지 2 이상의 찬성으로서 한다‘고 되어 있으므로, 참의원 승낙 없이 민의원 단독 개헌은 위법이라는 것이었다.
3. 개헌안 표결과 ‘사사오입개헌’
(1) 개헌안 부결과 ‘사사오입’ 개헌안 통과
① 개헌안 표결 : 사사오입 개헌안 통과
1954년 11월 27일 일괄표결 전 무소속의 송방용의원이 자유당의 암후투표 방지를 위한 발의를 했다. 이 문제로 논쟁을 하다가 감표의원이 투표 후 그 용지를 봉인하기로 합의한 후 무기명투표로 표결이 이루어졌다. 표결 결과 재적 203명 중 가 135, 부 60, 기권 6, 무효 1, 결석 1로서 사회자인 최순주부의장이 부결을 선포했다. 다음날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에서 긴급의원총회를 열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부에서도 긴급국무회의를 열고 논의한 끝에 갈홍기 공보처장이 개헌안이 통과되었다는 정부 견해를 발표함. “60표의 반대표는 총수의 3분지 1이 훨씬 되지 못한다. 한국은 표결에 있어서 단수를 계산하는 데 전례가 없었으나 단수는 계산에 넣지 말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개헌안은 통과되었다는 것이 정부의 견해이다.”
註33
다음날인 11월 29일 국회를 시작하자마자 사회자인 최순주 부의장은 “지난 회의에서 부결이라고 선포한 것은 계산착오이므로 취소하고 가결되었다”고 선포했다.
註34 국회에서 난투극이 벌어졌고, 이때 곽상훈 부의장이 “나도 부의장자격으로 개헌안부결을 확인 선포한다”고 의사봉을 두드렸다. 이기붕 의장이 장내를 수습하고 회의록 시정여부를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야당의원들이 총퇴장한 가운데 의석에 남은 자유당의원 125명(강세영 무소속의원 포함)이 긴급동의로 “개헌안은 재적의원 3분지 2인 135로서 가결된 것이고 지난 회의록은 계산착오이므로 정정한다”고 결의했다. 이날 오후 3시 경무대에서 임시국무회의를 열고 대통령서명을 개정헌법이 공포되었다.
註35
이렇게 ‘사사오입’으로 개헌을 통과시킨 자유당은 개헌 파동의 여파를 잠재우기 위해 강경 대응 방식을 택했다. 제94차 본회의에서 국회 부의장 곽상훈을 국회혼란을 이유로 불신임안을 가결하고, 야당의원들이 출석 거부하는 상황에서 통과과정에서 물리력을 행사했던 이철승, 김상돈 의원의 징계동의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정부와 자유당의 무리한 제2차 개헌 이후 자유당에서 이탈의원들에 대한 제명과 의원들의 자발적 탈당이 이어졌다. 1954년 12월 5일 이후 자유당 의원의 탈당이 이어져 총 18명이 탈당했고, 야당의석은 85석으로 늘어났다.
② 호헌동지회 구성과 신당운동 : 민주당과 진보당 결성
사사오입 개헌안이 자유당 의원들에 의해 번복 결의된 후 야당의원들은 계속 본회의 출석을 거부했다. 출석을 거부한 무소속동지회, 민주국민당과 무소속 60명이 날마다 대책을 세우고, 11월 29일에는 위헌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수의 횡포로서 가결된 것을 번복한 것은 비법적이라고 지적하며 헌법수호를 위해 계속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다음날인 30일 헌법수호의 뜻을 따라 ‘호헌동지회’라는 이름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했다. 12월 3일에는 새로운 야당연합조직을 만들기 위해 신당조직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호헌동지회 의원들은 본회의 거부 일주일만인 1954년 12월 4일 국회 제96차 본회의 전원 출석하여 사사오입 개헌에 대해 시비를 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당의 시도는 자유당의 숫자에 밀려 모두 부결되었다. 호헌동지회는 이기붕의장과 최순주부의장의 징계동의를 내걸고 공세를 했지만, 자유당에서는 곽상훈부의장 징계동의로 맞섰다. 9일에는 개헌안 가결 선포와 회의록 정정 과정의 결의가 불법으로 무효라는 요지의 회의록 번복안을 제출했으나 폐기되었다. 이어서 정부규탄안, 국무위원 백한성에 대한 불신임결의안, 공보처장 갈홍기 파면 결의안 등을 제출했지만, 12월 14일 모두 부결되었다. 이로써 11월 29일 이래의 개헌안 통과를 둘러싼 파동은 16일 만에 원내의 의제로서는 종지부를 찍었다. 이러한 파동 과정 중에 자유당 의원의 탈당과 호헌동지회 가입이 이어졌다.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가증하게 한 사사오입 개헌으로 여론이 비등하자 원내외의 반이승만 세력이 결집하였다. 당시 원내 반대세력의 분포는 무소속 상태인 민국당 14석, 윤병호를 교섭단체 대표로 등록한 ‘무소속 동지회’ 31석, 순수 모소속 23석 등 모두 68석이었다. 이들은 정치적 성격이 서로 다르고 조직도 분산되어 있었지만 개헌 반대에는 입장을 같이 했다. 이들이 원내교섭단체인 호헌동지회로 결집하였다.
註36
호헌동지회 결집 후 단일야당을 결성하기 위한 신당운동이 급속도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1954년 12월 2일 ‘야당연합신당’이 결성되었고, 다음날인 12월 3일에는 호헌동지회 지도층 7인으로 ‘신당발기촉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로부터 20여일 후인 1954년 12월 24일 발표한‘신당발기취지서’에는 자유당에서 이탈한 14명의 의원이 가담하였고, 원외세력도 조직적 차원에서 합류했다. 원외세력으로는 민국당의 원외조직, 조선민주당계 및 혁신계 인사, 흥사단 및 대한부인회 인사 등 광범위한 재야 지도층 인사들이 망아되어 있었다. 원외 주요인물로는 민국당의 김성수, 혁신계의 조봉암, 조선민주당계의 한근조, 원내자유당계의 장면,대한부인회의 박순천 등이 있었다.
註37
1954년 12월 28일에는 신당발기촉진위원회를 18인으로 보강하고 신당에는 ‘반공 반독재’에 동의하는 인사라면 무조건 참여시키기로 했다. 신당의 지도이념은, “반공반독재, 건전한 대외정치와 책임정치제도의 확립, 사회정의에 입각한 수탈 없는 국민경제체제의 발전, 민주우방과의 협조제휴를 통한 평화적 국제질서의 수립” 등 4개항이었다.
註38
그러나 정치적 성격과 각자의 조직이 다른 인사들이 모였기 때문에 지도이념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수탈 없는 국민경제체제 발전’이라는 항목이 사회주의 이론이라는 반론이 제기되면서 이념 대립이 표면화되었고, 급기야 조봉암의 참여문제로 비화되었다. 당시 신당 결성에 관한 모든 일은 ‘신당발기촉진위원회(18인 위원회)’에 위임했는데, 이들은 발기준비위원을 지명하기 위해 6개 항의 조직 요강을 발표하면서, 좌익전향자와 독재행위나 부패행위가 현저한 자를 제외한다고 밝혔다. 이는 혁신계의 조봉암과 족청계의 이범석·장택상 등의 참여를 막으려는 조치였다.
註39
조봉암은 신당에 적극 참여할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신당추진세력은 조봉암의 참여에 찬성하는 ‘민주대동파’와 반대하는 ‘자유민주파’로 분열되었다. 김성수·장택상·신도성 등의 ‘민주대동파’는 2대 대통령 선거에서 많은 지지표를 받은 조봉암을 참여시켜야 민주대동이 된다고 주장했지만, 조병옥·장면·김준연 등의 ‘자유민주파’는 정치이념이 달라 조봉암과의 제휴는 불가능하다고 반대했다 민국당은 신당이 이념 통일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註40
1955년 3월 11일 호헌동지회 전체회의에서 조봉암의 참여 문제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는데, 보수파인 자유민주파와 혁신파인 민주대동파로 크게 갈라졌다. 이로써 신당운동은 반자유당세력의 총결집을 이루지 못하고 민국당과 원내자유당 이탈세력만으로 추진되었다. 조봉암은 이를 두고 “민국당 내의 몇 사람이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들고 나서서 자기네와 같은 주의자, 동질자가 아니면 신당을 같이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야당연합적인 신당은 끝이 났다.”고 보았다.
註41
1955년 3월 25일 호헌동지회 총회에서 18인위원회 위원이 총사직하고, 이를 대치할 9인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준비위원회 구성부터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1955년 6월 6일 호헌동지회 총회에서 조직요강 1항을 삭제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6월말 이내로 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파간에 주도권 장악 문제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어서 결국 신당운동은 분열된 채 마무리되었다.
민국당은 1955년 9월 18일 중앙집행위원회 개최하고 당의 해체와 신당의 참가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기존 조직을 신당조직으로 전환시켰다. 동위원회가 1955년 9월 19일 대의원 2,013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기인대회와 창당대회를 개최하고 자유민주파의 신당발기위원회는 신당의 이름을 ‘민주당’이라 개칭함으로서 민주당의 창당을 보게 되었다. 당시 민주당 합류 의원들은 민국당계 13명, 무소속동지회계 10명, 무소속 5명, 자유당계 5명 등 모두 33명이었다.
註42 신당운동의 모체였던 호헌동지회의원 60명 중 절반을 겨우 넘는 정도였다.
민주당 창당은 민국당의 기존조직을 바탕으로 하여 원내세력의 일부만을 흡수한 민국당의 조직확대를 통한 재정비과정이었다. 자유당과의 힘의 정치에서 밀린 민국당이 1956년 선거를 의식하고 유권자의 지지획득을 위해 급조한 선거용 정당이었다.
註4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오입개헌으로 대통령이 권한이 더욱 강화되고, 개헌 과정의 불법성으로 인해 야당 세력이 뭉쳐 호헌동지회를 거쳐 민주당 창당으로 이어졌으므로, 민주당은 내각책임제 개헌 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
註44
민주대동파는 신당운동 불참을 선언하고 이탈하여, 독자적인 신당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55년 9월 세칭 ‘광릉회의’를 계기로 조봉암의 진보당과 서상일계의 민혁당이 조직되었다. 서상일, 민국당의 원외인사들, 장택상·임흥순을 중심으로 한 무소속동지회 및 무소속출신 인사들이 당시 위원회의 주요인사들이었다.
註45
(2) 제2차 개헌(사사오입개헌)의 의미
① 제2차 개헌(사사오입개헌)의 주요 개정내용
제2차 개헌은 30개 조항에 걸쳐 수정·삭제·중보가 행해졌다. 그 중 주요 개정내용은 다음과 같다.
註46
⦁국민투표제의 신설(주권의 제한 및 영토의 변경시) [제7조의2],
⦁대통령의 3선 금지조항(중임까지만 가능)을 삭제(부칙)하여 초대대통령에 한하여 3선제한을 철폐하고 무제한 입후보까지 가능하게 수정(제55조, 부칙 제3항)하였고,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이 대통령의 지위를 승계하도록 하여, 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전임자의 잔임기간 중 재임한다(제55조 제2항).
⦁국무총리제를 폐지(제68조·제73조)하여 순수한 대통령제로 환원하였고,
⦁“민의원에서 국무위원에 대하여 불신임결의를 하였을 때에는 당해 국무위원은 즉시 사직한다”고 하여, 국무위원의 연대책임제를 폐지하고 개별책임제만을 두어 개별 국무원에 대한 개벌적 불신임을 인정(제70조의 2 제1항)하였고,
⦁군법회의(군사재판)에 대한 헌법상 근거부여(제83조의2 제1항),
⦁경제조항의 자유경제체제로의 전환(제6장),
⦁헌법개정안의 국민발안(제98조 제1항),
⦁제98조 제6항에서 제1조(주권), 제2조(국민)와 제7조의2(국민투표)의 규정은 개폐할 수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헌법개정의 한계를 명문화함.
국민투표제 도입, 국무총리제 및 국무위원의 연대책임제를 폐지,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이 대통령 지위 계승, 군법회의의 설치근거 마련, 자유경제체제 보장 등이 주요 내용이다.
제2차 개정헌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부칙에 있었다. 부칙 말미에 “이 헌법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 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조문을 삽입하여, 이승만대통령의 종신연임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부칙에는 참의원 의원의 선거구를 기존에는 3부제로 운영하였는데, 득표수에 따라 제1부, 제2부로 나누고, 제1부 위원의 임기는 6년, 제2부는 3년으로 하였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참의원에게 주요 정부 요직 인사의 인준권을 부여하였는데, 참의원 선거는 1960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2년 1차 개헌안에 비하여 1954년의 개헌에서는 참의원이 인준해야할 정부 내 직책은 늘어났고, 이는 상원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1960년까지 상원인 참의원이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는 국회의 비준 없이 고위직 인사들을 임명할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정부는 참의원이 국회의 균형과 행정부에 대한 견제를 위해 조직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참의원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는 원하는 대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註47
② 제2차 개헌(사사오입개헌)의 의미
제2차 개헌은 이승만 개인의 3선을 위한 개헌이었고, 일단 부결 선포된 헌법개정안이 이른바 ‘사사오입’이론에 의하여 가결 선포되는 헌정사의 오점을 남긴 개헌으로 평가된다. 제2차 개헌의 위헌성에 대해서는 ‘사사오입개헌’이라는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의결정족수를 무시한 헌법개정이라는 점을 일차적으로 들 수 있다. 헌법을 불법적으로 개정하면서까지 장기집권하려는 사례는 장기집권과 독재를 위해 헌법을 마음대로 변개(變改)하는 취약성을 드러냈다. 다음으로는 개헌안 토론과정에서 야당의원들이 그 위헌성을 지적한 바와 같이,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것은 평등의 원칙에 위반되는 위헌 무효의 헌법개정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註48
국회에서의 심의는 1952년 제1차 헌법개정에 비해 민주적이었다고 평가되지만, 자유당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국회에서 편법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개정안 초안 작성 과정이 경무대와 자유당지도부 일부에 국한됨으로써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작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 더 근본적 문제였다. 헌법개정이 부결되고 번복되는 과정은 헌정사에 큰 오점을 남겼으며, 절차적 정당성뿐만 아니라 합법성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결국 1954년 헌법은 헌법개정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비민주적 정당구조로 말미암아 국회의 기능은 마비되고 국민의 의사는 왜곡되었으며 제도 자체의 의미까지도 변질되고 말았던 것이다.
註49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임기 보장으로만 알려져 있는 제2차 개헌은 내각책임제 요소를 갖고 있었던 제헌헌법의 조항들을 완전히 삭제하고, 대통령 중심제를 강화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2차 개헌의 골자는 국무총리제도를 없애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행정부의 수반으로 하는 제도에 대해 부담감을 가졌다. 제2차 개정헌법은 헌정 60년사에서 국무총리가 폐지된 유일한 헌법이었다. 아울러 국회의 책임을 경감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국회가 갖고 있던 국무위원 승인권 및 국무원 불신임 권한을 폐지하고, 개별 국무위원에 대한 불신임만 가능하도록 남겨두었다. 이는 입법부에 의한 행정부의 견제 권한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민의원은 국무위원에 대한 불신임결의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의원내각제적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註50
이 개헌으로 제헌헌법과 제1차 개정 이후 헌법에 포함되어 있던 의원내각제적 요소는 상당히 제거되었으나 이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권한이 실제로 더 강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의원내각제적 특성이 강한 헌법 하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를 무시하고 독주하였고 제2차 개정헌법은 이와 같은 현실을 보다 충실하게 반영한 헌법일 뿐이라는 것이다.
註51
부통령 승계권 문제는 1948년 제헌헌법과 1952년 헌법에서 “대통령 또는 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즉시 그 후임자를 선거한다”고 규정하였던 것을 선거 없이 부통령에게 승계시키는 것으로 변경했다. 대통령 유고시 선거가 오히려 정치적 혼란과 불안정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실제로는 부통령직을 차지함으로써 이승만 유고시 손쉽게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런데 부통령이 자동적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될 경우, 대통령과 부통령의 정당이 다른 경우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1954년 개헌안에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같은 정당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없었다. 국회 토론과정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註52 더 이상 논의가 진전되지 않았다.
제2차 개헌의 결과 형성된 1954년 헌법은 한국 헌법사에서 유일하게 국무총리 제도를 폐지함으로써 미국식 대통령제에 비교적 근접한 권력구조를 취하려고 하였고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의 지위 승계, 국민투표제도, 경제질서에 자유시장경제적 요소의 도입 등을 특징으로 한다. 경제질서 조항을 개정한 이유를 제헌헌법의 한계성과 전쟁의 영향에서 찾기도 한다.
註53 1948년 헌법은 정부형태와 경제질서 면에서 한계를 갖는데, 전쟁으로 인한 경제 파탄의 극복과 그 수단으로서 외자 유치를 위해 경제질서 조항을 개정했다는 것이다.
의회정치의 측면에서 보면, 사사오입개헌은 이승만대통령에게 종신 대통령의 가능성을 부여함으로써 한국정치를 군주제와 유사한 것으로 전락시켰고, 국회가 점차 자유당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국회가 심각할 정도로 자유당의 손 안에 들어가게 되었고, 국회는 점차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 사례로 첫째, 국회의장단과 상임위원장단을 자유당이 장악한 것, 둘째, 국회가 행정부의 ‘통법부(通法府)‘로 바뀌어 대통령과 행정부의 의사를 그대로 통과시켜 주는 국회로 전락한 것으로, 야당의 반발이 심한 경우에는 날치기 통과와 물리력까지 동원했다. 2.4파동 당시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註54 셋째, 당정협의회제를 도입하여 대통령과 행정부 의사를 당과 의회에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당정협의회제를 도입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註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