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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제 : 미국과 적산의 처리 문제

해방을 맞이한 한국인의 입장에서 식민잔재의 청산은 인적 청산과 물적 청산의 두 분야에서 처리해야 할 과제였다. 인적 청산은 일본인 및 식민지 지배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자, 소위 친일파들에 대한 청산의 문제이고 물적 청산은 식민통치의 지배구조와 그를 뒷받침한 물적 토대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통치의 효율성을 추구한 ‘현상유지 정책’을 통해 친일파의 인적 청산을 어렵게 만들었고, 이는 식민지 통치 구조를 온존시킴으로써 지배구조의 청산을 어렵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적 청산의 일부분으로서 일본 또는 일본인 및 그들이 소유했던 적산을 처리하는 것은 승전국인 미국의 입장에서 당연한 임무였다. 적산처리의 문제는 신한공사(New Korea Company, NKC)와 관재처(Office of Property Custody)를 설치하여 수행했는데, 일본 또는 일본인 소유의 재산권을 먼저 군정청이 취득하도록 했던 것은 남한 내의 유일한 합법 정부가 미군정이라는 인식 하에서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재산이었던 신한공사에 소속된 토지들은 중앙토지행정처를 통해 소작인들에게 매각되었다.
(1) 조선 내에 있는 일본인 재산권 취득에 관한 건 (법령 33호)
구(舊) 조선총독부의 권능을 그대로 이어받는 미군정은 1945년 9월 진주와 더불어 곧장 ‘적성 재산의 이전 제한조치’를 공포하고 지난 일본인 소유 내지 지배하에 있던 모든 재산에 대하여 일체의 재산권 행사를 금지시켰다. 이것이 곧 1945년 9월 25일 공포와 함께 곧바로 시행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미군정청 법령 제2호 “패전국 정부 등의 재산권 행사 등의 금지”이다. 이를 통해 미군정은 일본의 국·공유 재산은 무조건 미 군정청 당국이 접수하는 것으로 선언했으나 민간인 소유의 사유재산은 미군정의 접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즉 사유재산은 재산권의 법적 보호를 받을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1945년 12월 6일, 군정법령 제33호, “조선 내에 있는 일본인 재산권 취득에 관한 건”을 바탕으로 일체의 민간인 소유 일본인 재산까지도 미군정 소유로 귀속시키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법령 제33호의 제2조는 “1945년 8월 9일 이후 일본 정부, 그 기관 또는 그 국민, 회사, 단체, 조합, 그 정부의 기타 기관 혹은 그 정부가 조직 또는 취체(取締)한 단체가 직접간접으로 혹은 전부 또는 일부를 소유로 관리하는 금, 은, 백금, 통화, 증권, 은행감정, 채권, 유가증권 또는 본군정청의 관할 내에 존재하는 기타 전 종류의 재산 및 그 수입에 대한 소유권은 1945년 9월 25일 부로 조선군정청이 취득하고 조선군정청이 그 재산 전부를 소유함. 누구를 불문하고 군정청 허가없이 그 재산에 침입 또 점유하고 그 재산의 이전 또 그 재산의 가치효용을 훼손함을 불법으로 함.”이라고 하여 일본인 재산에 대한 종전의 입장을 완전히 뒤집었다. 즉 일본인 사유재산에 대한 매매 및 양도 등을 허용한 이전의 포고를 완전히 뒤엎고, 사유재산까지 포함한 모든 종류의 일본인 재산에 대하여, 그것도 포고 당일이 아니라 1945년 8월 9일자로 소급하여 동결 조치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치로 8월 9일 이후에 이루어진 모든 재산상의 변동행위는 일자를 소급하여 완전히 원인 무효가 되었고, 이미 재산을 처분하고 일본으로 귀환했거나 또는 귀국 준비 주이던 일본인들은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아울러 그 재산 처분의 당사자인 한국인에게도 간접적인 피해를 가져왔다. 註01
註01
이대근, 2015 『귀속재산 연구: 식민지 유산과 한국경제의 진로』 이숲, 376~3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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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법령 제2호의 해석, 기간의 연장, 이동 등기의 일반 금지에 대하여 (관재령 1호)
관재령은 ‘재산관리령’의 줄임말로 미군정이 ‘적산 관리’를 위해 1호부터 11호까지 공포한 법령이다. 1945년 11월 14일자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관재령 제1호는 9월 25일 공포한 법령 제2호, “패전국 정부 등의 재산권 행사 등이 금지” 공포 이후 약 50일 만에 법령의 해석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것이다.
관재령 1호는 “법령 제2호, 제3조 (라)항에 규정한 기한 60일의 설명, 기한의 연장”에서, 법령 제2호에 따라 일본인 사유재산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내용에 대해 군정청재산관리인이 요구하는 보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제3호 (라)항에서 “보고를 제출한 후 60일 이내에 조선 정부나 그 대행기관에서 금지명령이 없는 때는 그 취인은 성립될 수 있음”이라고 했으나 이때 60일이란, 군정청 재산관리인이 최후의 완전 정확한 보고서를 받은 후 60일을 의미한다고 선포했다. 즉, 기존의 민간인 간의 거래는 그 내용에 대한 ‘완전한 보고’ 이후 60일이 지나야만 인정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법령 제2호 공포 이후 50일이 지난 11월 14일자 기준으로는 어떠한 민간인 간의 거래도 승인 되지 않은 셈이 된다. 아울러 민간인 간의 재산 이전에 대해서도 재산관리소 제104호 양식이 재산관리인으로부터의 해당 등기소에 수령되든지, 또는 수령될 때까지 등기소, 지방법원, 기타에 등기치 못한다고 하여, 미군정이 요구하는 양식의 제출 없이 등기한 기존의 등기는 모두 무효로 하였다.
즉 1945년 11월 14일자 관재령 1호는, 9월 25일 법령 2호에서 일본 민간인 소유 사유재산의 거래를 허용했던 것을 12월 6일 법령 33호에서 완전히 뒤집어 일체의 민간인 소유 일본인 재산까지도 미군정 소유로 귀속시켰던 급격한 조치의 사전 정지 작업에 해당하는 법령이라 볼 수 있다.
(3) 조선군정청취득 일본인 재산의 보고 및 재산의 경영, 점유급사용에 관한 건 (관재령2호)
1945년 12월 14일자 관재령 제2호, “조선군정청 취득 일본인 재산의 보고 및 재산의 경영, 점유 및 사용에 관한 건”은 1945년 12월 6일, 군정법령 제33호, “조선 내에 있는 일본인 재산권 취득에 관한 건” 이후 공포한 관재령이다.
즉 “1945년 8월 9일 이후 일본 정부, 그 기관 또는 그 국민, 회사, 단체, 조합, 그 정부의 기타 기관 혹은 그 정부가 조직 또는 취체(取締)한 단체가 직접간접으로 혹은 전부 또는 일부를 소유로 관리하는 모든 종류의 재산과 그 수입에 대한 소유권은 1945년 12월 6일 발령 법령 제33호에 의하여 1945년 9월 25일부로 조선군정청이 취득했음”을 확인하면서, “그 재산을 소유 또는 관리하는 자는 그 재산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명령했다. 제출 기한은 1945년 12월 31일까지였고, 모두 세 통을 제출하도록 하면서 (가)~(사) 항목에 이르는 제출 양식을 제시했다.
(4) 재조선미군의 토지관리 (관재령3호)
1946년 1월 14일자 관재령 제3호, ‘재조선 미군의 토지관리’는 1945년 12월 6일자 군정법령 제 33호로 접수한 일본인 소유농지 중 개인농지를 신한공사(新韓公司)가 관리하도록 한 법령이다. 즉 본 법령의 2조에서 “1945년 9월 25일부로 조선군정청의 소유가 된 모든 경지는 신한공사(新韓公司)를 해당 재산의 보존, 이용 및 회계에 관하여 재산보관 상의 책임기관으로 지명하고 이를 관리케 함”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군정당국은 1946년 2월 21일자로 신한공사 설치령을 제정하여 군정의 대행기관으로 법적 지위를 강화했다. 이로써 신한공사는 중앙 5부와 6개 지점 그리고 현지사무소에 정규직 2,195명, 비정규직 667명, 농감 3,359명 계 6,221명으로 전 농가의 28.5%, 전농지의 15.3%를 관할하는 거대 지주회사(地主會社)가 되었다.
(5) 재조선미군의 토지관리책임 (관재령4호)
1946년 3월 8일자 관재령 제4호, ‘재조선 미군의 토지관리 책임’은 제2조에서 “농무국(산림과)은 일본국민(자연인, 법인), 일본 정부 또는 그의 기관이 이전 소유하였던 것으로 현재 여사한 미국육군부대나 군정청 기관에 접수되지 않은 1945년 12월 6일 발령 법령 제33호에 의하여 군정청에 1945년 9월 25일부로 귀속된 임야를 관리함”이라고 하여 신한공사는 경지를, 농무국 산림과는 임야를 관리하는 것으로 토지 관리의 주체를 나누었다. 관재령 4호에 따라 농무국 산림과가 “임야의 보존, 이용, 회계에 관하여 재산관리관의 책임대리기관으로 지정”된 것이다.
(6) 각종귀속사업체 운영에 관한 건 (관재령8호)
1946년 12월 31일자 관재령 제8호, “각종 귀속 사업체 운영에 관한 건”은 “제 귀속 사업체의 운영을 위한 이용, 보관, 재무에 관한 조선군정청 소속 각 행정관 각 기관 및 그 대행 기관의 책임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했다. 특히 제1조 제2항에서 “군정청 재산관리관은 현재 그 관할 하에 있는 귀속된 각종 기업체, 사회, 조합 기타 사업 단체 일체(공업, 광업, 상업, 청부업, 주업, 은행업, 농업, 임업, 금융업, 사립학교, 보험업, 운수업, 선박업)의 관리감독권(그 운영권과 그 관리자 내지 최고 책임자의 임명권을 포함함)을 관재처 관재 수속 요령에 규정한 수속에 의하여 군정청 각 부처 및 그 대행 기관의 소관 고문관에게 이를 이관함”이라고 하여 군정청 관재처가 관리해 온 총독부와 일본인 재산 중 회사와 공장 등 사업체의 관리를 각 관련 부처에 넘기기로 방침을 정한 것이다. 이는 귀속재산의 운영을 관련 부처에 맡겨 효율적 운영을 도모한다는 취지의 법령이었으나, 각 부서의 조선인 부처장이 아니라 미국인 고문관이 관리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7) 관재령8호의 개정 (관재령9호)
1947년 3월 31일자 관재령 제9호, “관재령 제8호의 개정”은 귀속사업체 운영을 관련 부처에게 넘기기로 한 관제령 제8호의 내용 중 “군정청 각 부처 및 그 대행 기관의 소관 고문관에게 이를 이관함”이라고 하여 조선인 부처장이 아니라 미국인 고문관이 귀속재산 관리 주체가 된다는 사실이 초래한 논란에 대응하기 위한 법령이다.
관재령 제8호 공포 후 약 한 달 동안은 별 논란이 없었으나 1947년 2월에 들어서면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귀속재산의 관리를 각 부서의 조선인 부처장이 아니라 미국인 고문관에게 맡긴다는 사실이 실행 단계에 접어들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러치 군정장관은 2월 6일 “효과적 운영을 위해 미 고문에 권한을 이양한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지만, 한국인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이에 반대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서는 “동 법령은 하지 중장이 누차 공약한 행정이양 정신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된다.”고 비판했고, 민전에서도 “관리권이 조선인 반동파에 이관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중요 산업 국유화 문제가 옳게 해결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중요 산업 관리권이 군정 고문관에게 장악되어 인민 경제 체제의 수립이 지연됨을 원치 않는다.”고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결국 안재홍은 민정장관, 상무국장, 입법의원 김호의 조선인 3인, 관재처장 고문, 농무부장 고문, 상무국장 고문의 미국인 3인으로 관재령 수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수정안을 작성, 러치 군정장관에게 제출했다. 러치는 이 수정안에 입각해서 관재령 제8호를 개정한 관재령 제9호를 1947년 3월 31일 공표했던 것이다.
(8) 법령제33호에 의한 귀속재산의 관리사업에 관한 취조, 구속급 기소 (행정명령6호)
1947년 10월 6일자 남조선 과도정부 행정명령 6호, “법령 제33호에 의한 귀속재산의 관리사업에 관한 취조, 구속 및 기소”는 법령 제33호, ‘조선 내에 있는 일본인 재산권 취득에 관한 건’에 의한 “귀속재산의 관리 사업에 관하여 이에 종사하는 관리인 또는 보조자의 취조, 구속 또는 기소로 인하여 지장을 받지 아니하고 그 운영을 계속함은 조선사회경제상 필요할 것이며 그 운영을 직접 감독하는 기관으로서 사업 운영 계속에 지장이 없게 대책을 강구함에는 이에 종사하는 관리인 또는 보조자의 취조, 구속 또는 기소됨을 O선요지(O先了知)함이 필요할 것이므로 좌와 같이 명령함”이라고 하여 귀속재산 관리의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한 조치로서 행정명령을 발하였다.
註01
이대근, 2015 『귀속재산 연구: 식민지 유산과 한국경제의 진로』 이숲, 376~3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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