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당국은 진주 초기 건국준비위원회 등에서 지방 단위로 조직했던 自警 조직 등을 분쇄하면서 남한 전역에 대하여 통일적 통솔체계를 가지는 군사조직을 구축해 나갔다. 한편으로 그 법제적인 기초를 미군의 「전시」군법으로부터 차용했으면서도, 다른 한편 국가가 부존재하는 점령지구 상태이기 때문에 「국방」조직이라는 명칭을 회피하여 「경비」조직을 표방해야 했다는 것은 초기 군 건설의 배경을 이룬 정치상황의 모순적 성격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 경비조직으로서의 초기 형성은 군과 경찰이 조직의 형성 과정에서 상당부분 유사한 출발점에 놓이도록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이 그 적용을 받는 국민에게 공개되어야 한다는 현대적인 상식과 달리, 군사조직에 관한 법률들은 그것이 비단 군 내부의 규율관계뿐만 아니라 국민(엄밀하게 말해 당시는 인민)을 처벌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공개되지 않았고, 조직법의 은밀성이 보다 전면에 강조되었다. 이 점은 이후 현대 법치주의적인 관점에서 오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 국방사령부설치, 군무국의 창설, 육해군부 설치, 경무군사기관의 금지 (법령28호)
미군정청은 1945년 11월 13일 공포·시행한 군정법령 제28호를 통하여 “조선의 종국의 독립을 준비하며, 세계국가에 오(伍)하야 조선의 주권과 대권의 보호, 안전에 필요한 병력을 급속히 준비”하며 “필요한 육해군의 소집, 조직, 훈련, 준비를 시작”하기 위하여 군정청 내에 국방사령부를 설치하면서 그 산하에 군무국, 경무국을 두며, 군무국 내에 육군부와 해군부를 설치하도록 하였다(국방사령부는 1946년 3월 29일 군정청의 국방부로 개칭되었다). 이 군정법령은 정부수립 이후의 국군의 모체가 되는 군사조직에 관한 최초 법령으로서, 남한 내에 여타의 군사·경찰조직 설치를 금함으로써 해방 직후의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등에서 설립한 경비조직을 배제하고 군정의 실효성을 강화하였다는 의의도 가진다.
(2) 조선경비대 급 조선해안경비대 (법령86호)
1946년 6월 15일 공포·시행된 군정법령 제86호 「조선경비대 及 조선해안경비대」는 군정법령 제28호를 대체한 것이다. 그 주된 내용은 종래의 국방부를 국내경비부(Department of Internal Security. 실제로는 ‘통위부(統衛部)’라는 호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註01)로 개칭하면서 그 산하에 있던 군무국을 폐지하여 경비국, 해안경비국의 2개 국(局)을 설치하면서 이들 국에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를 각각 두도록 한 것인데, 이와 같이 ‘국방’이라는 용어를 피하여 ‘경비’라는 명칭으로 대체한 데에는 단독국가를 전제로 하는 기존 용어의 사용에 대한 소련 측의 항의가 있었다. 같은 이유로, ‘경비대’의 설치목적 또한 군사조직이 아닌 “조선정부 예비 경찰대를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규정되었다(제2조).
한편 군정법령 제86조의 제4조와 제5조에 의하여 일종의 시행세칙으로서 조선경비청과 조선해안경비청에 관한 규정이 1946년 6월 15일자 「Articles for Government of Korean Constabulary」와 「Articles for Government of Korean Coast Guard」으로 제정되었는데, 이는 각각 「조선국방경비법」과 「조선해안경비법」이라는 명칭으로 국역, 공포되었다.
註02 이는 미국의 1920년 「전시군법」(Articles of War)을 속성번역한 것으로, 이후 제정된 「국방경비법」·「해안경비대」의 전신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3) 해안경비대의 직무 (법령189호)
1948년 5월 10일 군정법령 제189호로 제정된 「해안경비대의 직무」는 크게 두 가지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하나는, 군정청 운수부 해사국의 소관사항이었던 선박검사 및 선박직원 관리에 관한 업무를 통위부(=국내경비부) 해안경비국으로 이관한다는 것으로서 조직법규적 성격을 띠고 있다. 또 하나는 해안경비대의 활동구역인 연안해와 영해의 범위를 명시함으로써 군정법령 제86조 제3조의 규정을 보충하는 것이다. 다만 영해의 경우 이 법령의 시행 당시 조선이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국가의 영역으로서의 영해를 선언하였다기보다는 해안경비대의 행정상 경계를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4) 국방경비법
「국방경비법」과 「해안경비법」은 모두 『미군정법령집류』에 1948년 7월 5일자로 공포 내지 ‘공포지시’한 것으로 수록되어 있을 뿐 군정청 관보에 수록되어 있지 않고 그 법령 호수(號數)도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국방경비법」은 위 책자에 국문본만 수록되어 있고 영문본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군정법령으로서 유효하게 성립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는데, 대법원(1999.1.26. 선고 98두16620 판결)과 헌법재판소(2001.4.26. 선고 98헌바79·86, 99헌바36(병합) 결정)에서는 모두 이들이 군정법령으로서 관보 이외의 방법으로 공포되었던 것으로 추단한 바 있다. 여기에서도 일단 군정법령으로 전제하고 기술하기로 한다.
「국방경비법」은 내용상 육군에 적용되는 형사실체법적 규정과 형사절차법적 규정을 하나의 법률에 모두 담은 종합 군법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특히 형사실체법적 규정의 형태로서는 죄와 형을 규정한 각 조에서 특정한 구성요건을 충족하는 자를 “군법회의 판결에 의하여 처벌함”이라고만 규정함으로써 양형을 군법회의(군사법원의 전신)에서 재량으로 정하도록 하되 법령 말미에 ‘최고형벌표’를 규정함으로써 형의 상한만을 통제하였다.
이 법령은 일반적으로 군인·군속 등 군 관련 신분을 가진 자에게 적용되었다(제1조). 그러나 수많은 민간인에게 적용되었던 조항도 있는데, “직접, 간접으로 무기, 탄약, 양식, 금전 기타 물자로써 적을 구원 혹은 구원을 기도하거나 또는 고의로 적을 은닉 혹은 보호하거나 또는 적과 통신·연락 혹은 적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여하한 자”를 사형 또는 타 형벌에 처하도록 규정한 제32조(적에 대한 구원, 통신·연락 또는 방조), 그리고 “조선경비대의 여하한 요새지, 주둔지, 숙사 혹은 진영 내에서 간첩으로서 잠복 또는 행동하는 여하한 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한 제33조(간첩)가 그것이다.
「국방경비법」과 「해안경비법」은 정부수립 이후에도 유효한 법률로 취급되어 오다가, 5.16 이후의 구법령정리사업 과정에서 육군과 해군에 적용되는 규정들을 통합하되 ① 그 중 형사실체법적 규정들은 「군형법」(1962.1.20. 법률 제1003호)으로, ② 나머지 형사절차법적 규정들은 「군법회의법」(1962.1.20. 법률 제1004호)으로 대체입법하였다. 그러나 1962년 1월 20일 당시 「국방경비법」·「해안경비법」 위반으로 재판이 계속중이거나 확정되었던 사건에 대한 소송절차 및 형의 집행에 대하여는 위 구법들이 여전히 적용되었고(군법회의법 부칙 제2조), 이후로도 「사회안전법」(1975.7.16. 법률 제2769호), 「보안관찰법」(1989.6.16. 법률 제4132호)에서 이들 법률 위반전과를 가진 이들은 보안처분 내지 보안관찰의 대상으로 규정하였다.
(5) 해안경비법
「해안경비법」의 연혁과 내용은 대부분 「국방경비법」과 대부분 공통되므로 그에 관한 서술을 원용하고 아래에서는 「국방경비법」과 상이한 특징에 국한하여 서술한다.
「국방경비법」과 달리 「해안경비법」은 영문본이 “Articles for the Government of the Korean Coast Guard”라는 제목으로 한국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문서철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죄에 관하여는 육군에 적용되는 「국방경비법」과 비교할 때 해군의 특성을 반영한 범죄들이 규정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는데, 특히 제정 당시에는 「국방경비법」 제32조(적에 대한 구원, 통신·연락 또는 방조)에 해당하는 규정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인 1951년 2월 28일 법률 제177호로 개정된 「해안경비법」에서는 위 국방경비법 조항과 동일한 내용의 규정을 제8조의2로 신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