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전후 대한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영·중·소의 연합국 4강대국이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합의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국 최고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1945.9.2.)로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는 사실의 관계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를 전제로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를 점령한 미 제24군단은 남한 점령과 동시에 태평양미육군총사령부 포고 1호로 군정 설립과 점령의 조건을 밝혔고, 포고 2호로 해방의 공간에 점령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천명했다. 한국인들은 미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지만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권이 자신의 손 안에 있다’, ‘모든 명령에 복종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엄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를 담은 포고 제1호와 2호에는 그러한 한국인들의 감정을 배려한 흔적은 없었다.
이와 함께 미국의 3부 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는 한국의 미군 점령지역 내 민간 행정업무에 대하여 태평양방면 미군최고사령관에게 보내는 최초 기본훈령, SWNCC 176/8을 1945년 10월 13일 승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군정은 한국을 적국이었던 일본의 일부로 보고 군사적 점령한다는 점과, 검열과 정치 통제, 한국인 자치기구의 불허를 재확인했다. 결국 한국의 독립 문제는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의 외상회담에서 그 구체적 방안이 결정되었다. 1945년 12월 28일에 발표된 최종 결정문은 임시정부 수립을 선결과제로 제시하면서, 미국의 신탁통치 제안도 받아들인 절충적 결과였다. 모스크바 결정은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 미소공위와 한국의 정당·사회단체가 협의해 임시정부 수립 권고안 제출 ⇒ 4대국 심의 ⇒ 임시정부 수립 ⇒ 임시정부는 미소공위 밑에서 구체적인 신탁통치 협정 작성에 참가 ⇒ 4대국 신탁통치 협정 공동 심의’라는 복잡한 절차를 담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한국 독립에 관한 국제적 합의의 모호한 내용을 보다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통일정부 수립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권 문제 해결의 경로를 구체화한 것으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5년간의 신탁통치를 예상했다는 점에서 자주적 정부 수립과는 거리가 있었고, 그런 면에서 일정한 한계도 가졌다.
1) 카이로선언에서 포츠담선언까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11월 22~26일,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 주석은 연합국의 대일(對日) 전후(戰後)처리 방침에 관한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그 결과를 11월 27일에 서명, 12월 1일에 발표한 것이 카이로선언(the Cairo Declaration)이다.
이 회담을 통해 중국은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영국·소련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4대 열강으로 등장했다. 미국의 전후 세계 전략 구상의 일환으로 중국도 4대 강국의 자리에 초대되었던 것이다. 이 회담의 핵심 의제는 중국의 권리 및 영토 회복에 관한 것이었다. 이 회담에서 연합국은 일본이 1914년 이후 점령한 태평양의 위임 통치령, 중국으로부터 도취(盜取, stolen)한 영토(만주·대만·팽호도 등), 탐욕과 폭력으로 점령한 지역 등에서 구축된다고 결정했다. 이와 함께 적절한 시기에 한국의 자유와 독립이 약속되었다. 카이로선언의 한국 조항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기 3대 강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를 유념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와 독립 (상태가) 될 것을 결의한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카이로선언은 ‘전후’ 한국 독립을 약속한 연합국 최초의 공약이었고, 한국은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약속받은 유일한 아시아 국가였다. 또한 카이로선언은 한국의 자유·독립 회복을 결정했지만, 그 시기를 지금 즉시나 종전 직후가 아니라 ‘적절한 시기’라고 규정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다국적 신탁통치 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註01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은 포츠담회담으로 이어졌다. 포츠담회담은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한 뒤, 일본의 항복 문제와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의 전시 회담이다. 회담은 1945년 7월 17일에 시작하여, 8월 2일 종결되었다. 회담의 주요 의제는 패전국 독일의 통치방침, 해방국 폴란드의 서부 국경 결정, 패전국 오스트리아의 점령 방침, 동유럽에서 러시아의 역할, 패전국의 배상금문제, 대일(對日) 전쟁 수행 방침 등이었다.
포츠담선언(the Potsdam Declaration)은 1945년 7월 26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 장제스 중화민국 주석이 서명했고, 8월 8일 대일전 참전과 동시에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도 서명했다. 포츠담 선언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5항은 전문(前文)으로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인류와 일본국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6항은 군국주의의 배제, 제7항은 일본 영토의 보장점령, 제8항은 카이로선언의 실행과 일본영토의 한정, 제9항은 일본군대의 무장해제, 제10항은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및 강화, 언론·종교·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존중의 확립, 제11항은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 유지의 허가, 제12항은 민주주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점령군의 철수, 제13항은 일본군대의 무조건항복을 각각 규정하였다.
註02 한국 독립 문제와 관련된 포츠담선언의 제8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홋카이도(北海道)·큐슈(九州)·시코쿠(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 (The terms of the Cairo Declaration shall be carried out and Japanese sovereignty shall be limited to the islands of Honshu, Hokkaido, Kyushu, Shikoku and such minor islands as we determine.)”
이처럼 포츠담선언은 카이로선언을 승계해 전후 일본의 영토를 구체적으로 특정한 것이었다. 카이로선언은 포츠담선언 제8조에서 인용됨으로써, 연합국들의 공식 대일 영토정책이 되었다. 일본은 항복 선언에서 포츠담선언을 수락했고, 따라서 카이로선언의 영토 조항이 전후 연합국과 일본 모두에게 일본영토 처리의 합의된 기준점이 되었다.
註03
그러나 카이로선언과 이를 승계한 포츠담선언을 곧바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비인도적이고 비합법적인 것임을 확정한 것으로, 다시 말해 한반도 독립이 그런 비인도적이고 비합법적인 지배로부터의 광복(光復)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선언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미국은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만으로는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주권이 정식으로 종료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여부를 고민하면서 주권이 종료되었음을 별도로 천명할 절차가 필요한지 그 여부를 검토했다. 따라서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은 한반도 독립의 실현을 국제 정치에서 흔히 일어나는 전후 단순 영토 분리의 문제로 확정하는 기원이 되었다.
註04
2) 1945년 9월 7일, 태평양미육군총사령부 포고 제1호와 제2호
미 육군대장 더글러스 맥아더는 태평양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자 태평양미육군최고지휘관으로서 북위38도선 이남의 한반도와 일본을 점령했다. 이는 연합국 최고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에 근거한 것으로, 남한 점령에 앞서 1945년 9월 7일 포고 제1호를 발포하여 군정 설립과 점령 조건을 천명했다.
포고 제1호는 “오랜 동안 조선인의 노예화된 사실과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킬 결정을 고려한 결과 조선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 조항 이행과 조선인의 인권 及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음을 조선인은 인식할 줄로 확신하고 이 목적을 위하여 적극적 원조와 협력을 요구함.”이라고 하여 점령의 목적이 조선 독립에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제1조에서 “조선북위 38도 이남의 지역과 동 주민에 대한 모든 행정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서 실행함.”이라고 하여 군정(軍政)에 의한 직접 통치 방침을 분명히 했다. 이는 미군 점령 이전부터 전국적인 조직으로 자리 잡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이후의 인민위원회, 정부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1945년 11월이 되어서야 개인 자격으로 입국한 중경임시정부 등 한국인의 자치 역량을 인정하지 않는 조치였다.
또한 제2조에서는 “정부 공공단체 또는 기타의 명예직원과 고용과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직원과 고용인은 有給無給을 불문하고 또 기타 제반 중요한 직업에 종사하는 자는 別命있을 때까지 종래의 직무에 종사하고 또한 모든 기록과 재산의 보관에 任할 사.”라고 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 산하의 관료 및 경찰들을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존 업무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현상유지 정책’으로 임시적이고 행정편의주의적인 조치였지만 한국의 탈(脫)식민을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와 함께 같은 날 공포된 포고 제2호는 ‘범죄 또는 법규 위반’에 관한 것으로 “항복문서의 조항 또는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의 권한 하에 發한 포고, 명령, 지시를 범한 자, 미국인과 기타 연합국인의 인명 또는 소유물 또는 보안을 해한 자, 공중치안, 질서를 교란한 자, 정당한 행정을 방해하는 자 또는 연합군에 대하여 고의로 적대행위를 하는 자는 점령군 軍律회의에서 유죄로 결정한 후 동 회의의 결정하는 대로 사형 또는 他 형벌에 처함”이라고 하여 해방의 공간에 점령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천명했다.
맥아더 사령부 휘하의 하지(John R. Hodge) 중장과 그의 미 육군 제24군단(24th Coprs)이 상급 부대인 제10군(10th Army)과 함께 남조선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1945년 8월 11일 저녁이었다. 이 명령을 받았을 때 제24군단은 오키나와에서 1945년 11월로 예정된 일본 본토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하지의 제24군단은 9월 8일이 되어서야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1945년 9월 8일 아침나절 하지 일행을 실은 선단이 인천항에 도착했고, 오후 1시경부터 미군 비행기의 호위 속에 살벌한 분위기에서 상륙이 시작되었다. 부둣가에는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으나 일본 경찰의 제지로 환영 행사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일본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살해되고 여러 명이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하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면서 이미 무전으로 일본군에게 부두의 치안 유지를 일임한 바 있었다. 상륙을 전후해서 하지는 태평양미육군총사령부 포고 제1호와 제2호를 수차례 공중 살포했다. 한국인들은 미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지만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권이 자신의 손 안에 있다’, ‘모든 명령에 복종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엄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를 담은 포고 제1호와 2호에는 그러한 한국인들의 감정을 배려한 흔적은 없었다.
註05
3) SWNCC 176/8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의의와 한계
미국의 3부 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는 한국의 미군 점령지역 내 민간 행정업무에 대하여 태평양방면 미군최고사령관에게 보내는 최초 기본훈령, SWNCC 176/8을 1945년 10월 13일 승인했다. 이 기본훈령의 초안은 3부조정위원회 극동분과소위가 작성하여 9월 1일 SWNCC 176/3으로 회람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동 소위가 수정하여 9월 27일 176/6으로 회람하였다. 3부조정위원회는 두 개의 초안을 수정, 통합하여 10월 13일 SWNCC 176/8로 승인했다.
註06
SWNCC 176/8은 제1부 총괄 및 정치, 제2부 경제 및 민간 보급, 제3부 금융의 3부로 구성되었다. 1부의 2a항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점령으로 귀하[맥아더 사령관]는 적국 영토의 군사적 점령자로서 관례적 권한을 부여받는다.”고 하여 한국을 적국이었던 일본의 일부로 보고 군사적 점령한다는 점과, 9항의 정치활동에서 다음의 내용을 규정하여 검열과 정치 통제, 한국인 자치기구의 불허를 재확인했다.
(전략) 제1부 총괄 및 정치
(중략) 9. 정치활동
a. 일본 군국주의, 국민신도주의적(國民神道主義的) 및 초국가주의적 일본인의 이념과 선전의 보급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지든, 특히 한국에 대한 일본 통치의 지속을 주장하는 내용의 것은 금지되어야 할 것이며, 철저하게 억압되어야 할 것이다.
b. 귀하는 우편, 무선통신, 방송, 전화, 유·무선 전보, 영화 및 신문을 포함한 민간 언론기관에 대하여 군사적 안보와 본 훈령에 서술된 목표 달성이라는 우리의 이익에 필요한 정도의 최소한의 통제 및 검열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중략)
c. 귀하는 현존하는 모든 정당, 단체 및 정치적 결사를 귀하의 통제 하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 활동이 군사점령의 목표 및 요구와 일치하는 단체는 장려되어야 한다. 그 활동이 군사점령의 목표 및 요구와 일치하지 않는 것들은 폐지되어야 한다. (중략)
g. 귀하는 어떠한 자칭 한국임시정부 혹은 유사한 정치적 조직에 대해서도, 비록 상기 9a항에 의거하여 그 존립, 조직 및 활동은 허용할지라도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든가 정치적 목적에 이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귀하는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그 조직에 대해 어떠한 언질도 주지 않은 채 그러한 조직의 성원을 개인 자격으로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후략)
이런 상황에서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담이 열렸다. 3상회의는 전후 처리와 관련한 미해결 문제의 처리를 위해 개최된 것으로 대개 얄타 회담에서 이월된 문제를 다루었다. 회담 의제는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 등과 평화조약을 맺는 문제, 극동위원회와 일본, 중국, 한국에 관한 연합국협의회 설치 문제, 핵에너지 통제를 위한 국제협의체 설립 문제 등이었다. 회담에서는 전후 유럽의 처리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 사전에 소련에 ‘한국의 통합행정(Unifed Administration for Korea)’이라는 특별비망록을 전달했다. 이는 남북 통일 행정부의 조속한 수립, 한국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 신탁통치안의 주요 내용은 ① 4개국이 행정, 입법, 사법 기능을 수행하여 한국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5년간 신탁통치를 한다. 그것은 5년간 연장할 수 있다. ② 신탁통치 하에서 행정을 담당할 국제민간행정기구로 1명의 고등판무관과 4대국을 대표하는 4명의 위원으로 이루어진 집행위원회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선 정부수립, 후 신탁통치’를 대안으로 제출했고, 신탁통치 기간을 최소화시킬 것을 주장했다. 미국의 제안은 비정치적, 행정 실무적 문제를 우선하고 국제적 해결 방식을 주장하여 자신의 주도권과 우세를 보장받으려는 것이었다. 반면 소련은 해방 이후 한국 내 정세나 좌우 세력관계가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였고, 보다 본질적인 정부수립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주도권을 관철시키려 했다.
3상회의에서 타결한 ‘조선에 관한 결정’은 소련 제안을 원안으로 하고 여기에 사소한 내용, 표현상의 수정을 거쳐 완성됐다. 1945년 12월 28일에 발표된 최종 결정문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을 독립국으로 부흥시키고 조선이 민주주의 원칙 위에서 발전하게 하며 장기간에 걸친 일본 통치의 악독한 결과를 신속히 청산할 조건들을 창조할 목적으로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창설한다. 임시정부는 조선이 산업, 운수, 농촌경제 및 조선인민의 민족문화 발전을 위하여 모든 필요한 방책을 강구할 것이다.
② 조선임시정부 조직에 협력하며 이에 적응한 방책들을 예비 작성하기 위하여 남조선 미군사령부 대표들과 북조선 소련군사령부 대표로 공동위원회를 조직한다. 위원회는 자기의 제안을 작성할 때에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들, 사회단체들과 반드시 협의할 것이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문은 공동위원회 대표로 되어 있는 양국 정부의 최종적 결정이 있기 전에 미·소·영·중 각국 정부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③ 공동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참가시키고 조선민주주의 단체들을 끌어들여 조선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발전과 또는 조선국가 독립의 확립을 원조 협력하는 방책들도 작성할 것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 후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조선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후견)의 협정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소·영·중 각국 정부의 공동 심의를 받아야 한다.
④ 남·북 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문제를 심의하기 위하여 또는 남조선 미군사령부와 북조선 소련군사령부 간의 행정·경제 부문에 있어서의 일상적 조정을 확립하는 제 방안을 작성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 양국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모스크바 결정은 임시정부 수립을 선결과제로 제시했지만, 미국의 신탁통치 제안도 받아들인 절충적 결과였다. 모스크바 결정은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 미소공위와 한국의 정당·사회단체가 협의해 임시정부 수립 권고안 제출 ⇒ 4대국 심의 ⇒ 임시정부 수립 ⇒ 임시정부는 미소공위 밑에서 구체적인 신탁통치 협정 작성에 참가 ⇒ 4대국 신탁통치 협정 공동 심의’라는 복잡한 절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임시정부 수립안이나 신탁통치 협정 모두 5대국이 심의하도록 했고, 임시정부 수립은 미소공동위원회 활동에 의존하게 되었다. 미국은 이러한 다단계 수립 절차를 통해 미국측 정책 기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3상회의 결정은 ‘적절한 시기에’, 혹은 ‘적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에 독립을 부여한다는 카이로선언 이래 한국 독립에 관한 국제적 합의의 모호한 내용을 보다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또한 3상회의 결정은 통일정부 수립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권 문제 해결의 경로를 구체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 이래 한국의 독립국가 건설 사상의 커다란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안은 5년간의 신탁통치(혹은 후견)를 예상했다는 점에서 민족 역량의 전면적 개화를 통한 자주적 정부 수립과는 거리가 있었고, 그런 면에서 일정한 한계를 가졌다.
註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