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법
1) 「국회법 초안」 (1948년 6월 10일 국회 가결, 국회의장 공포)
1948년 5월 10일의 총선거로 제헌국회가 구성되어 5월 31일 개회하면서 곧바로 그 의사규칙을 담은 국회법의 제정은 시급한 과제였으나, 아직 헌법이 제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국회가 먼저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를 ‘법률’로서 제정할 수 있는지는 처음부터 문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우선은 시급히 국회법에 해당하는 규범을 도입해 놓을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헌법제정 이전에 완료되었을 때에 그 규범이 갖출 형식은 이후의 문제로 남았다. 그리하여 1948년 6월 10일에 국회의장에 의해서 법률로서 공포되었던 최초의 국회법을, 헌법에 근거해서만 법률이 제정될 수 있다는 원칙에 충실한다면 「국회법 초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제헌국회는 5월 31일의 첫 회의에서 일단 최소한의 회의규칙만을 담은 ‘국회임시준칙’을 내정한 뒤, 6월 1일 제2차 회의에서 전형위원 10명을 지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국회법급국회규칙기초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위원회(위원장 서정희)는 최윤동, 정광호, 서정희, 윤치영(이상 한민), 이원홍, 성낙서, 정구삼, 이유신(이상 독촉), 전진한(대한노총), 김약수(조선공화), 장기영, 김장열, 김봉두, 배헌, 김명동(이상 무소속)의 15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 국회법이나 그와 유사한 성격의 법률을 기초해 보았거나 적어도 의회의 의사운영을 경험해 본 사람은 정광호(임시의정원 의원)와 김약수(남조선과도입법의원 議員)뿐이다. 한편 전규홍, 노용호, 차윤홍, 김용근, 윤길중 5인이 전문위원으로 위촉되었는데, 이들 중 전규홍을 제외한 4인은 모두 신익희를 주축으로 구성된 ‘행정연구위원회’의 멤버였다. 행정연구위원회는 일제강점기 고등문관시험 출신으로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의사규정에 해당하는 원법(院法)을 기초한 실무진을 구성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결국 기초위원들의 의정경험이 적어 상대적으로 적어 상대적으로 ‘종전 입법’에 참여했던 전문위원들의 역할비중이 높았음을 시사한다.
기초경과는 가히 일사천리였다. 당시의 신문보도에 따르면 1948년 6월 4일에는 오전 10:30부터 의원실에서 “일사천리 격으로” 회의를 진행하여 “제1독회를 끝마치고”, 다음날인 6월 5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축조검토를 개시하여 정오경에는 30여조까지 완료하였다고 신문이 보도하면서 전체 조문은 약 90개조이며 ‘9개 위원회를 설치한다’는 윤곽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6월 7일에는 국회법(이하 ‘국회법 초안’)을 기초하여 국회에 제출하였다. 즉, 국회법 초안의 기초는 6월 4일부터 7일까지 단 나흘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6월 8일 국회법 기초위원장인 서정희는 국회 본회의에서 제안설명을 통해 “멀리는 미국의 또 불란서, 영국의 모든 국회법을 이 참작하고 또 가까운 데에는 중국이라든지 일본의 국회법을 참작해서 전문위원이 서가지고 여러 의논이 있는 뒤에 이것이 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미국·프랑스·영국·중국 의회 관련법의 내용이 참작되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국회법 초안의 편제나 대다수의 조문 내용에서는 제2차 대전 종전 후인 1947년 제정된 일본 「국회법」 및 「중의원규칙」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발견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헌법 제정 이전에 제정된 이 ‘국회법 초안’의 법적 형식을 어떻게 취할지에 관하여 국회에서는 약간의 토론이 있었으나, 1948년 6월 10일 국회 제7차 회의에서는 ‘헌법을 제정한 이후 헌법에 저촉되는 조항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삭제할 것’을 조건으로 부가하여 국회법을 원안(즉 초안) 그대로 표결로 가결통과시켰다. 그리고 헌법도 국회법도 없는 상태에서의 공포절차에 관하여 같은날,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일절 법률의 공포는 국회의장이 법률 정문에 서명함으로써 효력을 발한다”는 의안을 역시 표결로 가결통과시킴으로써, 국회법을 초안 그대로 ‘제정’하였다. 이 ‘국회법 초안’은 1948년 7월 17일의 헌법 공포·시행 이후로도 아래에서 보는 법률 제5호 국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국회 내에서의 의사규범으로 적용되었다.
2) 「제정 국회법」 (1948년 10월 2일 법률 제5호)
헌법제정 이후 위 국회법의 내용을 수정하기 위해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에서는 1948년 8월 30일 「국회법중개정법률안」을 성안하여 본회의에 상정했다. 헌법에 근거하여 입법한다는 면에서는 첫 국회법임에도 불구하고 「개정법률안」이라는 명칭을 쓴 것은 종전 국회법(초안)의 규범력을 국회 스스로 승인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법안을 상정받은 본회의에서는 곧바로 제1독회를 생략하고 곧바로 제2독회의 축조심의로 들어갔는데, 이 과정에서 종전 초안과 달리 ① 의장의 임기가 만료되더라도 후임자가 선거될 때까지는 전임자가 그 직무를 행하도록 하고, ② 지금의 교섭단체에 해당하는 각파 교섭회 제도를 신설하며 ③ 법률안 등의 발의, 의사일정 변경 및 수정동의(動議)에 필요한 정족수 등을 의원 10인에서 20인으로 상향한다는 내용은 모두 부결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단체교섭회」 제도의 신설취지에 관해 법사위원장인 백관수(한민)는 상임위원의 수를 교섭회 구성원 수에 비례하여 배정하는 등으로 정당 중심의 의회정치를 구현하고 안건처리의 신속을 기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했지만, (i) 이 제도에는 소수 정파의 의견을 참고할 기회를 박탈하는 폐해가 있으며 (ii) 의원으로 하여금 소속을 강요하는 결과가 된다는 문시환·강욱중(족청) 등의 반대에 이어 부결되었다. 그러나 ① 의원의 의석은 회기 초에 의장이 아닌 추첨으로 정하도록 하고, ② 정부조직법상의 정부기구에 맞추어 위원회의 일부 명칭을 변경하며, ③ 특히 예산안 심사절차에 관한 절(제4장 제6절 예산안)과 그에 관한 특별규정들을 신설한 점은 종전의 초안과 유의미하게 달라진 점이다. 그 밖의 점들에 있어서는 일부 조문의 위치와 자구변경을 제외하고 종전 초안과 대동소이하다.
그리하여 제정된 국회법(이하 ‘국회법’)의 내용을 살펴보면, 입법과정상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위원회중심주의와 본회의에서의 3독회제를 두고 있다는 데 있었다.
법률안, 건의안, 결의안 등 의안은 의원 10인 이상의 찬성으로 발의하여 의장에게 제출하며 법률안이 제출 또는 발의되었을 때에는 의장은 이를 국회에 보고한 후 적당한 위원회에 회부하여 심사보고토록 하였다(제33조 및 제39조). 회부된 법률안에 대한 위원회에서의 심사절차에 관하여는 심사안건에 대한 다른 의원의 의견을 들을 수있도록 하고 중요하다고 인정되거나 전문지식을 요하는 경우 국무위원·정부위원·이 해관계자 또는 학식경험이 있는 자로부터 의견을 들을 수 있도록 한 것(제24조) 외에는 현재와 같은 구체적 절차규정을 두지 않았다.
위원회에서 채택된 법률안은 그 보고에 의하여 제1독회를 개시하고 의안낭독, 질의 응답과 그 의안의 대체에 대하여 토론한 후 제2독회에 부의할 여부를 물은 결과 제2독 회에 부의하지 아니하기로 결의된 때에는 그 법률안은 폐기되었다. 제2독회에서는 축조낭독을 하여 심사하며 이 단계에서 주로 수정안에 대한 심사·채택이 이루어졌다.
의원은 제2독회 개시 전일까지 예비수정안을 제출할 수 있으며 예비수정안은 소관위원 회에 회부하여 심의정리 한 후 보고토록 하였다. 또한 의원은 제2독회에서 20인 이상의 연서로 수정동의를 제출할 수도 있었다. 제3독회에서는 의안전체의 가부를 의결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자구정정 외의 일체 수정동의는 허용되지 않았다. 제3독회를 마칠 때에 수정결의의 조항과 자구의 정리를 법사위원회 또는 의장에게 부탁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39조 내지 제41조).
제헌국회에서의 법률안을 비롯한 의안심사시 토론이나 질의와 관련하여 위원회의 경우 위원은 동일의제에 대하여 횟수에 제한되지 아니하고 발언할 수 있었으며 본회의의 경우는 횟수(2회) 제한이 있었던 것 외에 특히 국회의 결의가 있는 때 외에는 발언 시간을 제한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제23조 및 제46조). 또한 회기불계속의 원칙을 채택하여 회기 중에 의결되지 아니한 의안은 국회의 결의에 의하여 폐회 중 위원회에서 계속 심사토록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차기 국회에 계속되지 않도록 하였다(제61조).
3) 제1차 개정(1949년 7월 29일 법률 제38호)
국회법에 대하여는 1949년 5월 30일자로 김병회 외 14인, 그리고 서우석 외 13인이 각자 국회에 제출한 개정안을 회부받은 법사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대안을 만들어 7월 7일 국회에서 낭독했는데, 그 가장 중요한 골자는 종전 심의에서 부결되었던 「단체교섭회」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즉 20인 이상의 의원으로 구성되는 단체교섭회를 구성하고, 상임위원 및 특별위원은 이 단체별 소속 인원 수의 비율에 따라 배분하며, 발언자의 수도 이 비율에 따르도록 한 것이다. 이 개정안은 앞서 보았듯 국회 내에서의 정파구도가 다원적인 체제에서 양극체제로 회귀하는 시점에 제기되었고, 이 개정안에 대해서 이렇다 할 토론이 없이 모두 가결된 양상은 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유의미한 토론으로는 단지 단체교섭회의 요건을 「의원 30인 이상」으로 하자는 박순석(일민구락부)의 수정안에 대해 최운교·이진수(대한노농당)가 강력히 반대하면서 원안인 「20인 이상」으로 낙착된 정도를 들 수 있을 뿐이다.
이 개정안의 부수적인 내용 중 하나로서, 아래 「농지개혁법」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종래의 국회법 제61조가 회기불계속의 원칙을 규정함에 따라 국회가 가결하여 정부에 이송한 법률안에 대해 그 회기가 종료된 뒤에는 대통령이 재의요구를 하더라도 국회가 이를 재의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개정안 제61조에는 “국회폐회 중 헌법 제40조에 의하여 국회로 환부된 법률안은 그 법률안을 의결한 의원의 임기 중에 한하여 차기국회에 계속된다”는 제2항이 신설되어 토론 없이 통과되었다.